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
백화산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과 경상북도 상주시 경계에 위치한 백두대간의 한 줄기다, 나지막한 산이지만 깎아지른 절벽에다 협곡사이로 금강의 상류인 아름다운 시냇물도 흐르고 있어 한 폭의 그림 같은 산이다.
봄이 오고 있는 3월 하순, 4년째 누워 계신 누나의 병문안을 위해 급하게 한국방문 길에 나서면서 백화산 기슭을 찾아간 까닭은 누나와의 추억이 묻어있고 언젠가 한번은 갔어야 할 거기가 제2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새벽 일찍 동생과 함께 무궁화 열차를 타고 영동과 추풍령 사이 황간(黃澗)역에 도착하자 그곳 시골을 지키고 사는 6촌 동생이 20리 밖에서 반갑게 마중 나와 주었다.
달이 머물다 간 곳이라는 월류봉(月留峰)은 ‘한천 8경’에 들어있는 절경이고, 학이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 듯하다는 가학루(駕鶴樓)는 유형문화재에 속해있는 것도 모르고 나는 중학교 교가를 무심히 불렀었다. ‘월류봉 높이 솟아 달이 머물고 가학루 감돌아서 청계 진 곳에--’ 아름다운 산천은 뒤늦게 고향을 찾은 나그네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고향에 넋이 있어서인가.
그렇게 수려한 황간이건만 73년 전 한국전쟁 당시에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다, 낙동강 방어전선을 구축하는 동안은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수복 당시에는 산줄기를 따라 퇴각하는 북한군을 추격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곳곳에 주인 잃은 군모와 군화가 즐비했었다.
피난길에서 폭격기의 파편을 맞아 쓰러지신 아버지를 모시고 갓 난 동생을 업은 어머니가 병원을 찾아 헤매시는 사이 우리 남매들은 이산가족이 되었다. 열다섯 살 난 형이 인솔자가 되어 열네 살 된 누나는 네 살 난 동생을 업고, 열 살짜리 나는 누나의 혼수 감을 구겨 넣은 배낭을 메고 외할머니가 계신 곳에 내려왔다. 이렇게 피난생활이 시작된 곳이 영동군 황간면 금계리이고 그때 누나 등에 업혔던 동생이 오늘은 70 중반의 나이가 되어 나와 동행했다.
인구감소로 폐교가 된 황간 중학교와 용암 초등학교 운동장을 둘러보고 인적이 끊어진 옛 동네의 6촌 동생 집에 잠시 머문 뒤 인근의 노근리 사건 현장인 쌍굴 다리와 평화 기념관을 찾았다. 1950년 7월 미 공군기와 미 제1기병사단의 미군들에 의해 300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무참히 살해된 비극적인 현장이다. 전쟁이 두 번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는 다짐이 절로 나온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남북 간 군사적 대치는 물론 정부정책에 대한 국민의 반감도 폭발 직전이었다. 대통령은 과연 올바른 한미 동맹과 한일관계가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의지와 노력은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피난시절 누나는 신작로 개울 옆에서 피난민과 제2 국민병을 상대로 국밥장사 하시는 어머니를 돕기도 하고 때로는 어린 세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 다정하게 놀아주기도 했다. 비가 조금만 와도 넘쳐나던 개울 위로는 다리가 놓였으나 누나랑 놀던 개울가에는 지금도 하얀 모래가 봄 햇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아픈 누나와 아픈 한국을 두고 떠나면서 입안에 맴 돈 노래가 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슬픔 속에서 희망의 반짝임, 부활의 기쁨을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