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모세(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어느덧 시니어의 적지 않은 연령기에 들어섰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모든 행동이 유연하지 못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원래 어눌한 편인 나에게 더 어눌해진 것 같다는 가까운 이웃의 일깨움에 감사한다. 체력이 떨어져 정신력이 쇠한 것 같다는 염려로 들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의 차원에서 하는 충정의 마음이라 믿고 생활을 개선할 것이다. 어쩌면, 내 의식이 녹슬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정체성의 위기로 인해 합리성과 유연성을 잃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타인이 인정하는 나의 정체성이 정확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듭하게 된다. 언어 구사 능력이 부족해지며 매사에 빈틈이 없었던 일들이 흐트러지고 순발력이 떨어지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아직은 아니야라고 강한 부정을 하면서 걸을 때도 가슴을 쫙 펴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지만 말이다. 씩씩하게 보폭을 넓히고 활기찬 모습을 지니기 위해 애써 정신력과 체력을 다지고 있다.
인간관계의 공동체 모임에서 대화를 하다 보면 장황해지며 요점이 흐려질 때가 있다. 나 자신이 깨닫고 시정 해야 할 연약한 부분이다. 인간 이해가 깊은 사람은 끝까지 경청의 자세를 유지하지만, 어떤 사람은 짜증스럽다는 듯이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이내 분위기 파악이 되어 나이 들수록 말을 아끼라는 뜻일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씁쓸한 느낌은 쉽게 지울 수 없다.
할 말을 잃는다는 표현이 있다. 말의 요점을 정리해야 할 상황인데 정작 할 수 있는 말을 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말을 아끼게 된다. 대화 중에 말할 기회를 잃게 되는 인간 심리의 불편한 단면이다. 이때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누군가 정중하게 ‘말씀의 요점을 간략하게 마무리해 주시지요.’라고 웃음으로 권면하는 슬기로움을 발휘하였다. 그의 타인에 대한 존중의 마음과 지혜에 힘입어 이내 분위기가 부드러워져 한층 더 대화의 빛을 발하게 되었다. 나중에 인간 이해가 깊은 그에게 고마움을 표현한 후 관계가 돈독해져 지인으로 발전했다.
인간관계의 매끄럽지 못한 상황에서 주눅이 들어 어눌하다 못해 언어의 장애로 나타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심한 비약이 아니길 바란다. 어눌한 것이 뇌의 구조에 문제가 있다거나 언어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소심한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리라.
매사에 논리 정연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말만 번지레하고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면 차라리 어눌하고 투박해 보여도 진정성이 있는 말을 더 신뢰하게 되지 않던가? 어눌함 이면에는 어쩌면 다른 감정이 자리하고 있음을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억압된 감정이거나 자신의 뜻이 좌절된 수치심(분노)에서 오는 소극적이며 자연스럽지 못한 모습이 아닐까? 억압된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연약함을 불식시켜야 하리라. 부정적인 감정이 긍정적인 삶의 방법을 해치지 않기를 바란다.
부정적인 감정에서 정화가 이루어져야 함은 격정과 분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움을 향한 도전은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성찰이고 참신한 변화를 원하는 의지의 분출이 아닐는지?
필자도 인간의 위선,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자유스럽지 못했던 상처와 아픔을 지워야 했다. 지금은 나이 듦에 있어서 육체는 쇠해도 정신력과 마음은 날로 깊고 새로워짐을 느끼게 된다. 영혼의 정화와 삶의 균형을 이루는 가치 추구와 새로움을 향해 열린 존재가 되고자 함이다. 삶의 순수한 열망의 의지가 끊임없이 살아나 응어리지고 결핍된 내면을 가꾸는 시간이 되길 원한다. 정체성의 위기로 할 말을 잃었던 어눌함이 회복되는 기쁨의 순간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