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일
벌써 아홉 달이나 되었다. 내가 엄마라는 또 하나의 타이틀을 가지게 된 지도. 딱히 의도하지 않았고 언젠가는 되리라 막연히 생각했던 그것. ‘난 정말 잘 할 수 있을 거야’ 하고 오만방자하게 여겼던 그것. 그것이 바로 엄마다. 임신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는 모든 것이 막연하고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첫 초음파 검사를 할 때에도 내 몸 안에 또 하나의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별로 와 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난 늘 눈에 보이고 잡히는 것만이 진실이며 그 이외의 것들은 늘 불안정하고 신뢰하기 어려운 것들이라 여겨왔기에, 그 작은 콩알만 한 초음파 사진을 보면서도 딱히 엄마가 된다는 설렘은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씩 배가 불러오면서 나의 호르몬은 이리저리 널을 뛰며 날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싣고 마구마구 끝없이 휘둘러댔고, 그런 나를 감당하기 힘들어한 아기 아빠 또한 태교에 조금의 긍정적 영향을 주지 못한 체 난 만삭이 되었고 출산을 했다. 제왕절개로 하반신이 마비된 채 누워 있으면서 의사선생님이 빨리 아기를 꺼내기만 바라던 찰나 ‘응애’ 하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그리고는 너무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임신 내내 7년 넘게 키우던 고양이들이 뱃속의 아기보다 더 애틋했고 아이가 태어나도 난 그 고양이들이 아마 더 사랑스러울지도 몰라 하며 헛소리를 늘어놓던 내 안에서 뭔가 새로운 종류의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감정 혹은 느낌이었다. 조그마한 핏덩이가 내 머리맡에 내밀어지고서야 난 알았다. 내가 엄마가 되었구나. 이것이 바로 엄마라는 감정이구나. 그 감정은 그 핏덩이가 처음 기특하게 젖을 찾아 물고 빨던 그 순간 더욱 커졌다. 그리고 처음 눈을 뜨고 내게 눈을 맞추던 그 순간, 또다시 커졌으며 하루 하루 새로운 것을 해내고 보여주는 순간마다 더더욱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 감정은 참 견고한 듯하지만 흔들리기도 쉬워서 밤새 울어 대며 그 어떤 내 노력도 통하지 않는 그 아이를 미워하는 날도 늘어갔다. 일을 그만둔 나와 아이를 부양하기 위해 원래 한국에서 평생을 살아온 아이 아빠는 출산 얼마 후 한국으로 돈을 벌기 위해 돌아갔고, 친정 엄마도 체류 기간을 다 채우고 한국으로 귀국하셨다. 난 그렇게 ‘독박육아’를 시작했다. 난 그때까지 어리석게도 혼자 아이 보는 것쯤은 큰 일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베이비시터(baby sitter) 이모님께서 낮에는 도와주시지만 그 시간에 난 청소와 다른 집안일을 해야 했으며 이모님이 퇴근하시면 또 끝이 없을 것 같은 밤을 아이와 함께 고군분투해야 했다.
나는 세 살 무렵부터 엄마와 둘이 살았다. 부모님은 잦은 갈등 끝에 이혼하셨고 무남독녀인 나는 엄마와 함께 외가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당시 서른도 안 됐던 엄마는 이따금 친구 분들과 늦게까지 놀고 들어오실 때가 있었고, 외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날 돌봐주실 때도 많았다. 엄마는 나를 부족함 없이 키우시고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 하셨지만 당신도 젊고 어렸던지라 내 기억 속에는 몇 가지 매우 서운했던 일들이 늘 떨어지지도 않고 남아 있었다. 아이를 가지기 전, 난 반드시 우리 엄마보다는 좋은 엄마가 되어야지, 엄마 같은 엄마는 되지 말아야지, 하는 못된 생각을 몰래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나니 또 이렇게 혼자 돌보다 보니 내가 정말 천하에 배은망덕한 멍텅구리 딸임을 깨달았다. 그 몇 번의 서운한 기억 때문에 난 엄마가 보냈을 이 모든 잠 못 이루는 밤들과 끝이 보이지 않는 빨래와 젖병 소독의 무한반복을 완전히 무시해버렸던 것이다. 그 시절에는 내가 쓰는 멋진 젖병 소독기도 없었을 것이며 빨아서 바로 건조까지 할 수 있는 빨래건조기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걸 20대 초반이던 엄마는 혼자서 해냈을 것이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손가락 몇 개만 움직이면 누군가가 장도 봐 와준다. 무엇이든 검색해서 이유식이든 뭐든 원하는 정보는 다 얻을 수 있다. 그 시절엔 정말 물어 물어서 발품 팔아 나를 키우셨을 터인데, 참 나란 사람은 그 키워준 은혜를 그야말로 원수로 갚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부끄럽게도 그 자신만만하던 나는 엄마가 떠나신 지 체 두 달도 되지 않아 울고불고 엄마에게 도움 요청을 했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셨다. 본인도 본인의 삶이 있을 터인데 마흔이 다 된 딸을 도우려 기꺼이 당신의 삶을 뒤로 하고 태평양을 건너오신 것이다.
누군가 말했던가? 자식은 인생에 업보라고. 결코 버릴 수도 그렇다고 내 맘대로 되지도 않는 것이라고. 난 그렇게 우리 엄마 삶의 영원한 업보이며 지금도 우리 엄마는 그 업보를 짊어지고 살고 계신다. 이제는 나도 내 업보 하나를 만들어 또 그 길고 긴 여정을 시작했다. 이제 시작인데 믿기지 않을 만큼 버겁고 힘들어도 난 그 업보가 사랑스럽고 애틋한 걸 어찌하랴!
그런 업보가 또 다른 업보를 낳으면 어떠할지 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난 죽을 때까지 우리 엄마의 애틋함을 그리고 그 깊은 모정을 헤아릴 수 없으리라. 꼭 너 같은 자식 낳아보란 말이 최고 무서운 말임을 난 이제야 비로소 실감한다. 엄마는 이제 내 업보까지 자신의 업보인 양 열심히 돌봐주신다. 엄마란 참 신기한 존재인 것 같다.
이 힘든 일을 해내면서 늘 아이에게 미안하고 애틋하다. 그리고 내 아이를 위해서는 어떠한 것도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엄마도 그렇게 날 키웠을 것이고 나도 이제 이 아이를 그렇게 키울 것이다. 엄마가 된 지금도 엄마는 신기하고 위대한 것 같다. 엄마는 아마도 신이 당신을 대신해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돌보라고 보낸 존재는 아닐까?
약력
- 동의과학대학교 관광일어통역학과
- Hampshire College(Amherst, MA) 심리학, 비교 종교학 학사
- Harvard University, Clinical Psychology Lab research assistant
- University Pennsylvania, Psychology & Criminology Lab research assistant
- Columbia University School of Social Work 사회복지학 석사
- St. Vicent's Hospital (Harrison, NY), Inpatient social worker(정신과 병동 사회복지사) 2019-2022
- Structured Family Intervention (Atlanta, GA), Team Lead Therapist (소아 청소년 심리 상담사) 2022-현재
당선소감
우연히 아는 분이 올린 문학상 포스터를 보고 겁 없이 도전한 글쓰기였는데 이렇게 상까지 받게 되어 어안이 벙벙할 뿐입니다. 지난 10달간 엄마로 그리고 틈틈이 심리 상담사로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지내던 제게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사치였던 거 같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아이가 잠든 밤 시간에 틈틈이 생각을 글로 풀어내다 보니 제가 참 정신없이 뒤도 앞도 보지 않고 살고 있었음을 느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고 내 삶을 돌아본다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 일이였던 걸까요?
이번 문학상 공모를 통하여 잊고 지내던 글 쓰는 제 모습을 새삼스럽게 다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학창시절 저는 몽상가이기도 했으면 때로는 날카로운 눈으로 세상을 관철하기도 하던 꿈 많은 소녀였는데 지금은 애기 키우기 바쁜 아줌마가 되어 버린 거 같습니다.
제가 쓴 글에 상을 받아 마땅하다 가치를 부여해주신 애틀랜타 문학회 관계자 및 심사위원 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리는 바입니다. 잠과 싸워가며 아이가 깰까 조심스럽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적은 글이지만 이렇게 상을 주신다고 하니 엄마가 아닌 인간으로서 무언가 인정받은 기분에 가슴이 설렙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글을 쓰고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열심히 써보고 싶습니다.
조지아에 정착한지 아직 반년도 안 되는 제게 여러분이 주시는 뜻 깊은 환영인사라 생각하며 감사히 이 상을 받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