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우리들의 주변을 둘러보면 가정의 행복이 무너져 버리는 비극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에 부부의 로맨스 즉 아름다운 생활의 불꽃이 유지될 수 있는지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결혼에 대한 소명이 분명해야 합니다. 결혼에 대한 목표의식이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한 남자와 한 여인을 부르셔서 만남을 갖게 하셨을까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만남에는 결코 우연이란 없습니다. 그 만남은 정말 신적 만남,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만나게 해 주셨습니까? 여기에 결혼의 신적 소명, 즉 목표가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네 가지 대표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첫째는 연합입니다. 결혼의 소중한 목표 중에하나는 부부의 하나됨에 있습니다. 결혼은 자녀를 낳지 않아도 부부만으로 성립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녀가 없다는 것은 이혼 사유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결혼을 정의할 때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했지 그 이상의 결혼에 대한 정의가 없는 까닭입니다. 물론 자녀는 부가적 목적 중에 하나이지만 결혼 생활은 자녀가 없어도 성립될 수 있다는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없다는 이유로 이혼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에서의 그 하나됨이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루어가는 과정을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부부는 끊임없이 하나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된다. 한 몸이 된다고 할 때 얼른 생각하게 되는 일차적인 것은 신체적 연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분명한 것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즉. 인간은 결코 육체적 연합만으로는 완전한 연합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부의 하됨이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하나되고 인격적으로 하나되지 않고는 육체적으로도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바로 부부 생활의 3차원이 존재합니다. 인격을 전제하지 않고 육체적 연합만 강조하는 것은 사랑의 나눔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매춘 행위입니다. 매춘 행위에서는 상대방을 알 필요도 없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연합이 없습니다. 죄책감과 두려움과 파괴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연합, 인격적 연합을 말하지 않고는 참된 육체적 연합도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해 하와를 만들면서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그를 위하여라는 말은 본래 그와 통할 수 있는 이라는 뜻입니다. 그와 감정적으로 통하고 인격적으로 통하고 지적으로 통하는 사람이 배우자이고 이 통함을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정말 끊임없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 남남이었던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끊임없는 연합을 경험하는 것. 이것이 우리 생애에 하나의 중요한 목표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나는 당신과 주님 앞에서 온전한 연합을 성취 해 보겠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욱 하나가 되어가는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겠다 하는 것이 결혼의 목표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부부의 연합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그 신비한 연합에 비유할 정도 입니다. 그런데 과연 부부는 얼마만큼 사랑으로 연합을 성취해가고 있습니까? 부부가 함께 살아온 세월만큼 더욱 하나되기에 힘쓰는 분들이 많아 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