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숙(꽃길걷는 여인·쥬위시타워 보석줍기 회원)
어린 시절 여름이면 우리 동네 집집마다 봉숭아꽃이 한창이다. 돌담 밑과 나무 울타리 밑에 옹기종기 빨갛게 피어나는 정겹고, 예쁘고, 아름다운 봉숭아꽃. 지금도 봉숭아꽃을 보면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탐스럽게 피어오른 빨간 꽃과 잎을 미안한 맘으로 따 절구에 백반과 숯가루를 넣어 쿵쿵 찐 후 뽕나무 잎에 꼭꼭 쌓아 놓는다. 저녁이 되어 흔들거리는 등잔불 아래서 저녁을 먹고는 엄마를 따라 동네 아주머니들과 수건 하나 들고 하루종일 흘린 땀을 씻으러 달빛에 길을 더듬어 강가로 향한다. 캄캄한 강가에서 텀벙거리며 달빛에 보일듯 말듯한 몸을 씻으며 수다를 떨다가도 혹 남자가 나타날까봐 귀를 기울인다. 그때는 세수비누도 없어서 물로만 씻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고무신이 물에 젖어 아즈작 아즈작하는 소리가 캄캄한 밤에 머리를 쭈빗하게 하기도 한다. 젖은 머리를 하고 집에 들어가면 할머니가 툇마루에 모깃불 피워놓고 하루종일 땡볕에 익은 수박과 참외를 들고 나온다. 식구들이 둘러앉아 과일을 먹고 있노라면 내 마음은 언제 엄마가 뽕잎에 싸둔 봉숭아로 물을 들여 줄는지 마음이 바빠진다. 기다리다 못해 “엄마, 빨리 봉숭아 물!” 하면 그제서야 엄마는 미리 쪄 놓은 봉숭아를 등잔불 아래에서 손톱 위에 하나씩 하나씩 올려 뽕나무 잎으로 감싼 후 실로 칭칭 감아준다. 모기장으로 들어가 열 손가락 쫙 펴서 조심스레 배 위에 얹어놓고, 자다가 빠질까봐 몇 번을 깨어 만져보고 또 만져보고 하다가 깊이 잠들어버린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기 전에 손톱 먼저 만져보면 몇 개 안 남고 거의 빠져 버렸다. 놀래서 눈을 떠 보니 손톱 물은 희미하게 들었고 감싼 뽕잎들은 이부자리 여기저기를 빨갛게 물들여놨다. 엄마한테 혼날까봐 미리 아양 떨며 잉잉거리면서 엄마한테 간다. 엄마는 “이그 조심해야지” 하지만 나는 속으로 “잠을 자는데 어떻게 조심해” 하며 대꾸한다.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세 번은 물을 들여야 예쁜 색깔이 나온다. 예쁘게 물든 손톱을 보고 또 보며 행복해하던 어린 시절 그 모습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