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시니어 아파트 작은 공간이지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면서 우리 집 거실을 카페 삼아 모임 장소로 제공돼 온 지 오래다. 방역 지침으로 방문객 제한이 시작되자 파트락 메뉴로 파빌리온이 있는 공원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듯 평온한 만남 조차도 시샘한 오미크론 역습으로 한 해가 저물어가고 새해가 들어서고 스산한 겨울 추위가 물러갈 즈음에 긴 공백을 떠밀어 보내고 ‘우리 카페’ 식구들 모임이 기지개를 켜게 되었다.
긴 기다림 끝에 만난 카페 가족들이 따뜻한 문안을 나누느라 분주한 것 같았는데 문득 ‘어머 못 뵙던 동안 예뻐지셨어요’ 갑작스런 엉뚱한 칭찬을 듣게 되다니. 칭찬에 약한 주책머리 발동으로 얼른 차에 올라 거울을 본다. 여전히 수준 미달에 나이든 얼굴인데 갑자기 예뻐졌을 리가. 하지만 편안한 분위기는 고수해 온 것 같은데 남은 날 동안 어떠한 표정을 담고 세상을 살아가게 될까. 나이 들어버린 굳어진 얼굴이라 다듬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것인데 그저 그립고 미워할 수 없는 얼굴이고 싶다.
나이 탓인지 사람을 만나고 얼굴을 대하다 보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얼추 짐작이 간다. 살아온 내력이 표정에 나타나 있고 대화를 주고 받다 보면 생각과 소양까지 읽어진다. 잘 생기고 덜 생긴 범주가 아닌 눈매나 말소리 격앙에 따라 살아온 잔재가 엿보인다. 뒷모습이나 앉고 서는 작은 동작 행동거지에서도 살아온 분위기가 드러나기도 한다.
안정되고 편안해 보이는 분은 이기적으로 영악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심는 대로 거두는 신의를 중하게 여기며 살아왔을 것 같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낸 눈빛은 평온하고 안정돼 있기 마련이니까. 활기차고 밝은 얼굴은 건강까지 자신이 있어 보인다.
아침 저녁 무심코 거울보기를 하지만 갈수록 세월 나이테가 선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눈가 주름이 정겹게 보였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니다. 세월을 묵묵히 관조해온 주름이 생을 발효시키고 숙성시킨 흔적으로 지워지지 않는 깊은 골을 만들고 있다. 정직과 성실이 새겨져 있는가 하면 실망과 투정이 분화구 사구 마냥 새겨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인생살이가 기록된 살아있는 기록장이 따로 없다 싶다. 찰나의 삶이 꾸밈없이 기록되어 있으니까. 얼굴은 인격의 심상이며 신원을 보증하고 대외적 명분 표 간판으로 인생 패스포드에 버금간다.
얼굴 표정에서 진실됨과 거짓된 심리를 파악하게 되지만 환심을 사기 위해 표정을 조율하는 극기 기술을 가지고 순박한 척 표정을 구사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권력과 재물 맛에 길들여져 카멜레온처럼 변패되는 것 또한 보아온 터였으니까. 신실한 도덕성과 인간다운 양식을 지녔다면 부끄러움, 수치심이 얼굴에 아무런 구사없이 있는 그대로 떠올라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인생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수 밖에 없지만 표정만은 진실되게 읽어낼 수 있어야 할 터인데 세상은 갈수록 표정만으로 진실 여부를 가려내기가 오리 무중으로 빠져들고 있다.
속 사람이 지니고 있는 순수함이 표정으로 드러나는 것은 값지고 신실한 삶을 살아온 결과가 아닐까. 얼굴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담고 있기에 순간적으로 표정을 급조할 수 없음이요 아무리 분장 수준의 화장을 덧칠한다고 해서 표정을 조정할 수는 없는 것. 가식 없는 순수한 표정을 지니신 분들은 어떻게 살아왔으며 무엇으로 살아왔을까. 평소 심도 있는 자아 다스림이 삶의 바탕이 되어지고, 사랑으로 주변을 섬기며, 겸손과 지혜로 신실하게 내면을 가꾸어 왔기에 바람직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은은하게 지혜로움이 새겨져 있는 순수한 표정들을 주변에서 자주 만나 지기를 소망해본다.
나이 들어갈수록 존경 받는 얼굴이 되지 못하고 쓸모 없는 낡은 얼굴임을 깨달아가는 일은 마음 아픈 일이다. ‘태어날 때 얼굴은 부모가 만들어 주었지만, 성장하면서 자신의 얼굴은 본인의 생각과 행동이 표정으로 발현되기 때문에 40세가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 는 말이 얼굴 서시를 제대로 써가며 살았는지 짐짓 부끄러움을 일깨워준다. 링컨 대통령이 남기신 명언이 새삼스레 무겁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