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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아침] 겨울이 떠나고 있다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2-03-11 10:42:22

행복한 아침, 김정자(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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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자(시인·수필가)

 

겨울이 떠나고 있다.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볼에 닿았던 싸늘한 냉기가 그리울 만큼 봄기운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겨울이 떠나고 있는 산책길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만난다.

독일계 미국인 부부는 먼 발치에서 서로를 발견하면 온몸으로 체조를 하듯 팔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곤 한다. 핸디캡 주차장에 차를 두시는 나이 지긋하신 남자분은 회색빛 애완견과 산책을 나오신다. 두 아이를 둔 젊은 아빠 가족은 큰 아이는 제 자전거를 타고 작은 아이는 전면 시트에 안전장치를 장착한 아빠 자전거로 동반하는데 만날 때 마다 모두 웃음 띤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곤 한다. 여러 해를 넘기는 동안 아이들도 자라고 정겨운 이웃처럼 지내게 되었다. 이름도 집이 어딘지도 모르지만 며칠 보이지 않으면 어딘가 불편하신 건 아닌지 궁금해지고 염려가 앞선다. 계절이 오고 있네요, 겨울이 떠나고 있네요, 계절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친분이 쌓여가면서 어느새 정이 들었다.

입춘 경첩도 이미 지났고 춘분이 겨울 길목을 휘영 돌아 저 만치로 다가오고 있다. 매화가 만개한 이른 봄이다. 쌓인 낙엽을 들추다 보면 파릇한 싹이 올라와 있다. 어색할 것 하나 없는데 어쩐지 겨울이 간다는 게 낯선 간이역에 내린 것 마냥 막막함과 설렘이 교차된다. 계절은 그렇게 들어서고 언뜻언뜻 무심히 보내버린 하루들을 되돌릴 수 없을 지경으로 문득 느껴질 무렵이면 실없이 떠나버리곤 했던 것을. 겨울 내내 낯익은 들꽃이며 수목들이 풍경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글이 되어 주었다. 아직 가랑잎이 밟히고 해오름 무렵에나 해질녘에 찾아본 산책길 내음은 아직 겨울 뒷자락을 붙들고 있는데, 전염병 치다꺼리로 덧없이 겨울을 보낸 것 같아 흩어져버린 시간을 주섬주섬 긁어 모으고 있다. 되돌릴 수 없어 더욱 소중한 겨울이다. 겨울 바람인지 봄바람인지 그렇다고 편파적이지는 않지만 어물쩍한 바람결이 짜증스럽다. 차갑도록 시원했으면 좋으련만 보드랍거나 따뜻하지도 않은 걸쭉한 줏대 없는 바람결이 떠나는 겨울을 붙들어 두고 싶게 만든다.

모임 이름을 부탁받은 적이 있었다. ‘조약돌’로 추천을 해드리면서 개울 따라, 시내를 따라, 강줄기 따라 서로 부딪고 비비면서 흘러내려 오는 동안 둥글고 매끈한 예쁜 조약돌로 다듬어지듯 그렇게 살아가자고. 모임 멤버들 중에 동년배들이 몇 분 계시길래 친밀감, 신뢰감을 키워보자고 가지고 있는 책을 나누어보는 일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공감할 수 있는 여지의 길을 터 보자는 마음으로. 흥미로운 실마리를 공유하다 보면 익숙한 기억과 시공을 초월하는 상상이 혼재를 이루면서 더 도타운 정이 교류될 것이란 기대감을 실어 보았지만 예상보다 결과는 그리 실하지 않았다. 시대 정서가 더는 녹녹하게 허용하지 않음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작금의 시대는 혼자 생각하고 겨울 숲을 즐길 수 밖에 없는 시대로 몰고 가면서 막상 겨울 숲의 평화 실체 또한 그리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인생은 그런 것이었다. 이만큼 살았으니 한숨돌려도 될 것 같다고 마음을 어루만질 무렵이면 또 다른 계절풍이 불어닥친다. 겨울에 익숙해지고 계속 겨울이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할 무렵이면 봄이 들어서듯이. 삶의 순환도 계절의 순환처럼 생의 변주곡일 따름일까. 아픈 부분은 지워내고 다시 쓰고 싶음을 용납해줄 것 같았던 겨울마저 떠나고 있다.

동질의 생각을 한다고 치부되면 동지로, 아니면 적으로 나눠버리는 이원론적 세상 속에서 살아가느라 겨울 바람의 확연한 차가움을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은 아쉬움이 한 몫을 한 것일까. 겨울의 진지한 냉철함이 벌써 그립다. 세상을 향한 겨울 나무의 안쓰러운 시선이 지긋이 느껴진다. 겨울도 아닌 봄도 아닌 즈음이라 해질녘 느긋한 시간이 기다려 진다.

햇살이 질펀했던 하루가 저물고 저녁나절이 되면 하루 중 가장 매혹적인 설명 불가한 풍경이 펼쳐진다. 영상으로 남겨두고 싶은 시간들이다. 석양과 겨울은 마지막이란 여운을 지니고 있어서일까. 해가 기우는 시간이면 방랑을 신명껏 부려볼 수 있을 것 같아 괜스레 방만 해지곤 한다. 노을 그림자가 스러져가는 동안 만이라도 떠나는 겨울 마음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석양이 연민처럼 슬프도록 아름답다. 겨울은 저무는 하루처럼 한 계절을 완성해낸 아름다움을 남겼다. 황홀하게 불타는 노을이 사위어 가듯 인생도 계절도 하루도 끝 매듭은 그토록 매혹적으로 쓸쓸하게 떠나는 것을. 나목이 새움을 틔우는 것을 보고서야 겨울은 떠날 수가 있었나보다. 떠나는 겨울과의 살뜰한 석별을 위해 산책길에 나섰다.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산책길은 자가 면역치료제가 되어 주었는데 어느덧 저물녘 낯설고 외로운 행로로 접어 들었다. 떠나는 겨울이랑 해질녘 풍경이랑 함께 어우러지는 산책길이 매혹의 풍경 속으로 물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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