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야훼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누가 여호와 하나님을 감히 불러낼 수 있을까요? 세상에 미천한 병원균에 불과한 코로나 바이러스 세균 앞에서도 혼비백산 우왕좌왕하는 존재가 무슨 자격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생사화복의 절대주권을 주관하시는 전능자를 불러서 내게로 오게 만들 수 있을까요? 자격여부를 논하자면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된 <혼연일체>를 이루는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입니다. “들음에 대한 상실”이란 명저를 남긴 Michael P. Nichols박사는 “듣는 것을 배우는 것은 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Learning to listen can improve relationships”는 명훈을 남겼습니다. 이 말을 역으로 말하면, “듣기를 소홀히 하는 자는 모든 관계를 파괴하는 비극을 초래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소박한 진리와는 무관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은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그 가치를 존중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자신의 말에 무관심하고 소홀히 하는 상대를 멀리하고 꺼려하는 것이 사회의 황금률(The Golden Rule)입니다.
이사야의 황금률에 해당하는 이사야 55장 6절의 말씀과 부합되는 신약성경의 말씀을 들자면 당연히 황금반지 중앙에 박혀있는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로마서 말씀입니다. 그중에서도 롬1장과 2장이 이사야의 말씀에 부합한 말씀입니다. 바울서신의 핵심에 해당하는 서신은 당연히 로마서입니다. 바울의 신앙을 대변하는 <이신칭의, Justification>의 말씀이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이고, 나아가서 바울은 당당하게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내가 자랑하는 복음”이라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똑똑하게 밝혔습니다. 하나님은 이 바울같은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들음을 좋아하십니다. 나의 관(觀), 나의 주의(主義), 나의 철학(哲學)을 배설물처럼 과감하게 내려놓는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들음을 즐기는 자를 좋아하십니다. 이미 오래전에 믿음의 족장들(Patriarch)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었으며, 가시떨기 나무 아래에서 출애굽의 대장정을 이끈 모세가 보여주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지를 보여준 믿음의 조상들을 떠올린다면 오늘날, 무엇이 대화의 장벽을 가로막는지를 선명하게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듣기를 잘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신음소리까지, 미세한 바람소리 같은 작은 절규의 소리마저 소홀히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너는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이 시대는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일을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듣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일을 멈추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과학과 문명이 한계를 느끼고 절규하는 절제절명의 순간, 이사야의 황금률은 큰 소리로 메아리를 울립니다. “너희는 야훼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이사야 55장 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