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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아침] 건망증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1-01-22 11:11:43

김정자,수필,행복한아침

구양숙 부동산표정원 융자누가 스킨 케어

식사 시간에 맞추어 메인 메뉴에 밑반찬과 가벼운 국까지, 상차림을 마쳤다. 주걱을 들고 밥솥을 열자 밥이 없다. 이런 난감함이란 쥐구멍 찾을 정도가 아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하늘이 하얘진다. 이런 진풍경이 연출되지 않아야 할 터이지만 위선은 냄비밥부터 앉힌다. 우리집 할배께선 이미 각오를 하신 모양이다. 이런 일이 처음있는 일도 아니고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닌 것을. ‘조금 천천히 먹으면 되지 뭘’ 하신다. 머리를 콩콩 두어차례 꿀밤을 먹인다. 구차한 장면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런 증상이 이태전 부터 간간히 진행되었지만 그럴 수도 있지로 넘겨보기도 했지만 이젠 더는 허용해서는 안될 일인줄 익히 알면서도 면구스러움을 무마해보려는 속셈으로 뜬금없이 할배 탓으로 돌리는 묘수가 떠올랐다. ‘이건 분명히 함께 사는 사람의 협조가 부족한 탓이에요. 밥은 준비가 되었는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이라니까요’ 무루츰하니 앉아 계시던 할배께서 장단을 맞추어 주신다. ‘그러게  내가 미처 챙기지 못했구려. 이제부턴 신경쓰도록 하리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비현실적인 일이 버젓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밥을 앉힐 시간이 되면 ‘여보 밥할 시간이 된 것 같애’ 라며 신호를 주시기 시작하셨다.

외출시에도 다를바없이 제대로 챙긴다고는 했지만 한 두가지 빠트리는 일이 발생한다. ‘당신이 제대로 챙겼어야할 일인데’ 라며 민망함에서 빠져나오곤 한다.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습관이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 했다. 더는 계면쩍은 일을 만들지 않아야겠다는 다짐 자체가 답답하고 딱하고 안타깝지만 겸연쩍음도 송구스러움도 더는 비벼댈 구석이 없음이요 난처한 장면을 다시금 범할 자신감은 더더욱 없음이라서 민망함에 마침표를 찍어야겠다는 결심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이상하리만치 할배 탓으로 돌리고부터는 아차하는 일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건망증 회복 신종 치료법을 발견한 신기한 분기점이 되어 주었다. 건망증엔 특효약이 없다는데. 몸에 밴 습관처럼 주방 전기 레인지는 확인했는지, 집안 불은 스위치를 다 내렸는지, 현관은 제대로 잠궜는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미심쩍어 다시 가서 확인해보면 번번히 이상무였던것을. 괜한 헛걸음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마스크를 쓴 채 침을 뱉았다는 난처한 얘기를 들어도 감히 ‘어찌 그럴 수가’라는 말을 내밀지 못한다. 살아있기에 그러려니 하기엔 무게감이 무겁다. 

두어해 전만 해도 젊었을때와 크게 골이 깊지 않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나이 든 후에 해야할 일들이 선명히 보였었기에 아직은 나이 무게가 더하기 전에 나눔에도 희생에도 진한 땀을 흘려보고 싶었는데. 가끔은 날짜도 요일도 잊은채지만 나이들기 전에 도전해보고 싶은 것들을 건망증에 실어 흘러보내고 싶진 않다는 다짐조차도 넋두리가 될 전망이다. 금방 얘기하려고 했었는데 머릿 속이 하얘지고, 언뜻 떠오르는 글줄을 파일에 옮기려 하는 순간 까맣게 떠오르지 않는다. 전화기 메모란이 고역 중이지만 전화기조차도 잊고 외출하기가 일쑤다. 다행히 마트에 갈땐 우리집 할배께서 필수적인 메모로 도와주신다. 건망증 시리즈가 노부부의 밋밋한 일상을 추동해주기도 하지만, 건망증이 유난히 기승을 부리는 날은 가슴에서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작년 다르고 어제가 다르다. 눈가 잔주름 같이 건망증은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잊어버리자고 묻어버리고 싶다하면 할수록 소롯이 또렷이 돋아나는 깃털 같은 기억들. 이것 만은 결코 절대로 분명히 기억해야지 마음의 서랍장에 꼬깃꼬깃 잘 접어두었다 싶어 마음을 놓아버리면 어느 결에 모랫벌에 써둔 글씨같이 지워져버리는 기억들. 어차피 남은 날들이 끝나는 날. 잊고 갈 것, 두고 갈 것들이 남겨질 터라서 계절마다 정리해가던 사물들도 메모지에 줄을 세워두었다. 시도 때도 없이 정돈하고 정리하면서 하냥 가볍게 떠나자고. 때로는 잊기 위하여 꿈을 꾸기도 했었고 잊기 위하여 불렀던 노래도 있었는데, 잊기 위하여 헛웃음을 만들기도 했지만 시방까지 살다보니 세상에 잊어선 안 되는 일이란 없는 것이었다. 가슴에 못이 박힌 일까지도 깡그리 잊어지는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한 적도 있었으니까. 그 날이 이리도 성큼 다가설 줄이야. 보고싶지 않은 사람을 잊는다는 것을 축복이라 생각했던 그 즈음으로 돌아가면 먼저 손을 내밀고 말리라. 적당한 잊음과 적당한 기억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라서 매일 매일 단속해야할 것들, 잠궈야할 것들, 열어두어야할 것들. 뽑아두어야할 것들, 잊지말고 끄고, 닫아두어야할 것들이 모두 쉬웠던 시간들이 있었는데. 기억줄의 나이테에 금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나보다. 

나목의 나이테는 깊은 겨울을 지나면 금 하나를 더해갈 터인데. 건망증으로 부서지는 아픔들까지도 소중한 기억줄에 매어두고 싶은 깊은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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