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TV에서 일했던 나와 김규환씨와 한성태씨 세 사람은 가발 장사가 돈 벌기 쉬운 꽃놀이같은 것으로 착각하고 기고만장 축배를 높이 들고 춤을 추며 신나게 출발을 했다.
사전 준비나 시장 조사를 무시한 채 시작한 가발 행상의 결과는 가발을 한 개도 팔지 못하는 참담한 결과가 발생했고 무식하게 큰 돈을 벌겠다는 허망한 꿈이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세 사람은 실패를 자인하고 장사를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1974년 이민 초기 무지한 세 사람이 돈을 벌겠다고 마구 시작한 코메디같은 가발 행상의 실화다.
다음날 한성태씨는 Philadelphia로 돌아가고 나와 김규환씨는 의논을 거듭한 끝에 가발 장사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로 했다. 가발 장사를 시작한 유흥주씨의 조언대로 인구 5만 가까운 소도시 중 한인들이 운영하고 있는 가발상이 없는 곳을 찾아 나섰다. 동남부 각 도시를 조사하면서 상공회의소를 찾아 인구 분포와 상업 현황과 전망을 조사했다. 그러나 한인들이 운영하는 가발상이 없는 곳을 찾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나는 인구 5만 이하의 소도시인 Dublin , GA에 상점을 임대했으며 김규환씨는 Waycross, GA에 상점을 임대했다. 앞으로 장사가 어떻게 될지 알 길이 없지만 또 다시 도박은 시작됐다.
동남부 각 도시를 찾아 다니며 알게 된 것은 한국 사람들이 넓은 미국 각 도시에서 가발상을 운영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과 또 가는 곳마다 태권도 도장이 있는데 관장은 거의 다 한국 사람들이었고 일부 미국 사람들이 운영하는 도장이 있는데 도장마다 태극기와 성조기가 비치돼 있고 기본 교육에 대한 구령은 한국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현장을 직접 목격한 나는 태권도가 국위 선양에 빛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실감했고 지난 날 고국에서 태권도를 외면해 왔던 무지를 뉘우치게 됐다.
집에 도착하니 뉴욕 최수영씨로 부터 편지가 와 있었다. 그 분은 한국 의류 가공회사 뉴욕 지사장인데 본사에서 수입금 일부를 나에게 전달하라고 했다며 돈을 찾아 가라는 내용이었다. 그 돈은 한국에서 집을 판 돈의 일부인데 당시 돈을 마음대로 가지고 외국을 나갈 수가 없었고 이민을 가는 사람들도 가족당 $200.00이 법적인 한도 금액이었기 때문에 편법을 활용했다. 하지만 고위층이나 부정 축재자들은 외화를 마음대로 가지고 나가 흥청망청 쓰면서 살았다. 한국사회 실정이 불공정했지만 법을 어긴 것은 잘못이고 죄를 지은 것이라 양심상 참회를 했다.
나는 돈도 찾고 물건도 구입할겸 뉴욕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최원용씨를 다시 찾아가게 됐다, 가족과 함께 뉴욕 구경도 할겸 겁도 없이 차를 몰고 뉴욕행을 결정을 하고 밤 늦게까지 지도를 펴 놓고 복잡한 길들을 점검하고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