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자화상,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의 책망만 받은 교회를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표현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특성처럼 교회 역시 차지도 덥지도 않은 어중간한 <안주지대, 신앙의 파토지대>임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시고 책망만 하신 교회입니다. 북쪽으로
는 <히에라볼리>가 남쪽으로는 <골로새>가 위치하는 점이지대에 위치한 라오디게아 도성은 그 환경의 영향에 있어서도 결코 영향을 끼치는 도성이 아니라, 영향을 받고 살았습니다.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온천수를 보면서 <신앙의 열정>을 선망하고, 골로새 지역의 차가운 냉각수를 보면서 <냉철한 지성으로 진리를 파수하는 ‘얼음냉수’와 같은 믿음>을 관망하는 가운데 그들의 신앙은 열정의 신앙도 얼음냉수와 같은 충성스러운 믿음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처럼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하여 미지근한 것을 내가 토하여 내치리라”는 말씀처럼 그들의 신앙은 전혀 감동의 대상이 아닌 <역겨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심각성>을 한 마디로 지적하자면 <지금의 자화상>을 읽을 수 없는 영적 소경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7절을 주목하시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좀더 강도를
높여서 예수님이 지적하신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벌거벗은 수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벌거벗은 수치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지금의 자화상을 예수님의 직설적 표현, 즉 돌직구에 해당하는 평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지금의 자화상인 <벌거벗은 수치>를 알 길이 전혀 없습니다. 그 해결방안에 대하여 예수님은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약>은 무엇을 상징하는 말일까요? <안약>은 글자 그대로 이해하자면, 희뿌엿한 시야를 밝혀주는 <Eye drops>입니다. 작은 액체의 약을 예민한 눈에 바르는 순간, 동공 안의 모든 불순물은 순식간에 씻겨져 광명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의학적 특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안약>은 이런 단순한 육체의 현상을 해결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 현상을 그대로 두면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 같은 저 유황불못의 지옥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너무나 형편없는 <영혼의 심각성>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약물로 치유하는 정도의 단순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한 <신앙의 열정과 참 회개>의 영적 대지진이 일어나야 하는 상태입니다. 바로 지금 현하의 세계가 그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가진 자일수록 하나님의 현존성을 부인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증가되는 세계의 심각성>은 단순히 안약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의 자화상인 자신의 벌거벗은 수치(Shameful Nakedness)를 자각하지 못하는 이 세상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바라보게 하는 최선의 해결책으로 “열정과 회개”로 도전하십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절) 환경적인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라오디게아는 남쪽으로 6마일 떨
어진 데니즐리에서 물을 끌어와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했습니다. 이 물은 미네랄 성분이 많은 온천수의 일종으
로 물의 온도는 미지근했습니다. 아마도 거리가 가까운 것과 우선 쓰기에 좋도록 <물이 미지근했다>는 것이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지금의 자화상> 라오디게아 교회가 시사하는 가장 큰 이슈는 세상에 전혀 영향력이 없는 통탄함
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하는데,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지금의 자화상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현실입니다. 뜨겁게 열정으로 불타오르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얼음냉수처럼 추수기에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충성된 믿음은 영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Self Worship” 즉 현대판 “바벨탑”에 해당하는 자신의 명예와 성공에만 혈안이 되어 그것이 부요함이라고 착각하는 라오디게
아 교회를 향하여 영안을 열어 자신을 직시하라는 것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신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도전은 한 마디로 <Why not the best?>입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이것이 주님이 주고자 하시는 <열정과 회개>의 도전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같은 21세기의 교회들이여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지미 카더 대통령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인생의 지침이 된 강력한 도전장 ,
오늘 모든 사람들의 자화상이 되어야 할 인생의 길표, 영혼의 지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