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와 1970년대에, 미국은 여전히 공산국가들과의 심한 충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부분의 미국 지도자들은 이 시기 중 내내 세계를 냉전 면에서 보았으며, 소비에트권의 위협에 대항하려고 노력했다. 쿠바는 케네디 시대의 미소대결장이 되었다.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군이 1959년에 집권하고, 소련의 지지를 얻은 이래, 미국의 대쿠바 관계에는 긴장이 계속되었다. 미국은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하기 직전에 외교적인 유대를 단절했으며,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은 망명한 쿠바인들이 자기들의 고국을 침공하고 폭동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해 망명한 쿠바인들을 훈련하기 시작했다. 1961년의 피그만에서의 공격은 비참하게 실패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시작한 계획을 찬성한 케네디 대통령은 그 패배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다.
그 이듬해, 상실한 위신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던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이 비밀리에 쿠바에 공격용 핵미사일을 설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여러 다른 선택사항들을 고려한 후, 소련 선박들이 더 이상 미사일을 가져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쿠바를) 봉쇄하기로 결정한 다음, 소련이 그 핵무기를 철거하도록 공공연히 요구했다. 세계가 과거의 그 어느 때 보다고 더 핵전쟁에 접근한 긴장의 5,6일이 지난 후, 소련이 물러섰다. 지지자들은 케네디의 용기에 박수 갈채를 보냈으며, 비판자들은 조용한 외교가 보다 적절했을지도 모르는 때에 그가 핵재난의 위험을 무릅썼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쿠바의 미사일 위기는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긴장을 완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미소 양측이 깨달음에 따라 미소 관계에 있어서의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 이듬해, 미소·영은 대기권 내에서의 핵무기 실험을 금지한 획기적인 부분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했다.
우주계획
1957년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한 후 우주는 또 하나의 전장이 되었다. 미국은 앞지름을 당했다. 왜냐하면 소련의 핵폭탄을 손쉽게 운반할 수 있는 로켓으로 인공위성을 궤도에 진입시켰기 때문이다. 미국은 1958년에야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엑스플로러' 1호를 발사할 수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미국이 인간을 달에 상륙시킨 다음, 그를 다시 지구로 귀환시킬 것이라는 다짐으로써 대응했다.
1962년 8월 '머큐리 계획'으로 해서 존 H. 글렌 2세가 지구 상공에서 궤도를 도는 최초의 미국 우주비행사가 되었다. 1960년 우주 비행이 인간에게 주는 영향을 조사하였다. '제미니'호('제미니'는 쌍둥이라는 뜻의 라틴어임)는 2명의 우주비행사를 실었는데, 이것은 과거의 '머큐리' 우주선들보다는 1명이 더 많았고, 그 후의 '아폴로' 우주선보다는 1명이 적은 수의 우주비행사를 실은 것이다. '제미니' 계획은 1965년 8월의 8일간의 임무, 즉 당시의 최장기 우주비행과, 1966년 11월의 지구 대기권으로의 자동 조정 재진입을 포함하여, 몇 가지 최초로 시도한 일들을 성취했다. '제미니'호는 또한 비행 중의 2개의 유인(有人) 우주선의 최초의 도킹(연결)과 미국 우주비행사의 최초의 우주 유영을 성취했다.
아폴로 계획은 케네디의 목표를 성취시켜주었다. 1969년 7월 수억의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국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은 달 표면을 걷는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그 밖의 '아폴로' 우주선 비행이 뒤따랐지만, 많은 미국민들이 유인 우주비행의 가치를 문제로 삼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엽에 기타 우선순위 과제들이 보다 긴급하게 되자. 미국은 우주계획의 규모를 축소시켰다. 일부 '아폴로' 비행들이 취소되었으며, 2개의 '스카이랩' 우주 정거장 중 하나 만이 건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