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삶의 여로에서](/image/fit/47575.webp)
김건흡 (애틀란타 청솔시니어센터 회원)
아름다운 동행
며칠 전 집에서 스크랩 북을 정리하다가 오래 전 아내한테서 받은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누렇게 바랜 편지는 50년 전 우리가 첫선을 보던 때의 추억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여보, 당신의 환갑을 축하드려요.
그러고 보니 우리가 영락교회에서 백년가약을 맺은 지도 어언 30년이 지난 것 같군요.
무더운 여름 어느 날이었지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서울 을지로 3가의 그 다방을 기억하세요?
그날 당신이 작은 어머니로부터 오후에 잠깐 시내에서 만나자는 전화를 받고 영문도 모른 채 근무 중에 불려나온 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은 바로 그 맞선보는 자리였다고 했지요.
가난한 집안 8남매의 맏아들인 당신이 나이 30이 넘도록 아직 결혼할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다급해진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가 본인에게는 알리지도 않은 채 꾸민 음모(?)였다는 것을 후에 어머니한테서 들었어요. 그래서 시어머니가 될 어머니는 그날 선보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셨지요.
그날 첫선 자리라고 우리 쪽에서는 해외에 체류 중인 부모님을 대신해서 20여 명의 집안 어른들이 대거 참석했는데 정작 남자 쪽에서는 노란 남방셔츠 차림의 당신과 작은 어머니 두 사람이 달랑 나타났으니 그때 우리 쪽 어른들의 놀라움은 어땠을까요. 저도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참으로 기묘한 첫 만남이었지요 그때 당신은 좀 까칠한 모습이었지만, 웃을 때 살짝 눈가의 잔주름이 자상하게 보여 호감(?)이 갔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단벌 신사인 당신이 며칠 전에 양복을 도둑맞고 당장 입을 옷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찡했어요. 그 후 양복을 새로 맞춰 입고 우리 집에 찾아왔을 때 얼마나 멋있던지… 깜짝 놀랐어요. 그때에야 당신이 미남이라는 걸 알았지요.
우리가 교제할 때 제가 가끔 데이트 약속시간에 늦어 약속장소에 헐레벌떡 뛰어가 보면 길가 한쪽 벽에 기댄 채 책을 읽고 있는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우리에게도 그렇게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건만 시간은 바람처럼 날아가 버리고 어느새 우리는 이렇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네요.
여보, 사랑해요.
당신은 근면하고 성실하고 검소한데 나는 헤프고 절약할 줄 모르고 쓰기만 좋아하지요. 당신의 노력으로 우리가 오늘날 이만한 삶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오늘까지 건강하게 살아 준 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당신의 환갑 기념으로 산정호수 한화콘도에 가자는 나의 제안에 당신은 “환갑은 무슨?”하면서 펄쩍 뛰었지요. IMF 외환위기로 나라 경제가 어렵고 온통 뒤숭숭한 때였으니 당신이 만류하는 것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저는 물러설 수가 없었어요.
당신의 삶은 제 삶이며, 당신의 어머니는 제 어머니예요. 어머님이 그동안 미국에서 적적한 생활을 하시다가 잠시 귀국하셨는데 이번 기회에 하루만이라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당신도 모처럼 잡다한 일상사에서 벗어나 즐거운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설사 우리 앞에 홍해 바다가 가로막는다 해도, 나라 경제가 아무리 어렵다 해도 우리 마음마저 위축되거나 의기소침할 것 없고, 그저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절약하고 나눠먹고, 또 풍부하면 감사하면서 내 할 일 하면서 살아가는 흔들리지 않는 삶이라고나 할까요. 의연함이라고나 할까요.
하나님이 주신 삶은 아름다운 것. 우리에게 주어진 삶속에서 감사하면서 누리며 살고 싶어요. 아직은 당신이 건강하고, 좋은 직장에서 일할 수 있고, 든든한 두 아들이 있고, 또 마침 미국에서 연로하신 어머님과 동서도 왔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정말 제 마음은 부자가 된 것 같아요.
“하루해가 이미 저물어도 오히려 노을이 아름답고, 한해가 곧 저물려 해도 오히려 귤 향기가 더욱 꽃답다”는 옛말이 있지요. 이제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황혼의 낙조가 찬란한 마지막 빛을 발하듯 우리의 노년이 더욱 빛을 발하는 그런 아름다운 삶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여보 사랑해요!
당신의 영원한 사랑 드림.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때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구나. 8남매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언제 한번 기를 펴보지도 못하고 살아온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고왔던 얼굴이 이제는 쪼글쪼글하다. 그래도 나에게는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이다.
수십 년 세월 내 옆에 있어준 나의 일부, 영원한 내 편이 바로 부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50년간 서로에게 길들여져 있어 누구와 바꾼대도 지금같이 편안할까. 그러니 이 세상에 머물도록 허락받은 그 시간까지 더 사랑하며 살고자 한다.
아무래도 나이가 드니 죽음이 좀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모든 생명 있는 자의 절대적인 원칙대로 세상에 태어났기에, 기약된 이별의 순간이 우리에게도 차츰차츰 다가오고 있음을 알기에, 아내를 좀 더 아끼며 살려고 한다. 청솔시니어센터에 가면 항상 눈길이 가는 문구가 있다. ‘아름다운 동행!’그래요. 우리 손잡고 함께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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