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간혹 병상을 찾는다든지 고통당하는 사람을 방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특히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생각 없이 던지는 말에 자칫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뭔가 위로를 하려다가 ‘집사님. 그렇게 아프실 때 가끔 마음에 가책되는 것이 없습니까?” 또 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환자에게 ‘형제님. 병이 들었다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분노를 터뜨리는 일이 없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것부터 회개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고쳐 주실 거예요. 건강하실 때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셨나요?” 하는 투의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아픈 데를 찌르는 소리입니다. 또 이런 말도 하더군요 ‘목사님. 목사님이 그렇게 아프신 것은 주변의 고통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시려고 하나님이 그렇게 사신 거예요. 그렇습니다. 말이야 다 옳은 말입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무슨 위로가 됩니까? 은근히 죄책만 자극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고통이란 참고 견디어 나가는 것이지 왈가왈부 떠들 일이 아닙니다. 짊어져야 할 것이지 왜 고통을 당하는가 하고 이유를 따져야 할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울 때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 유능한 설교자. 해박한 친구가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고통당하는 자에게는 그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무슨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네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네. 정말 가슴이 아프다네. 답답하지만 참아야지 어떻게 하겠나? 언제나 내 마음은 자네와 함께 있다네. 참고 견디세” 이런 말 한마디가 고통 당하는 자에게는 두세 시간의 설교보다도 더 힘있는 메시지가 되어 가슴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욥의 친구들을 통해서 고통의 이유를 함부로 설명하려 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사람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도 인간이 만족할 만한 해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도를 생각하고 그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대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신 동안 그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거의가 무거운 고통의 짐을 지고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멀리서만 보아도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렇게 천벌을 받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천덕꾸러기요. 인간 취급을 못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창녀요. 세리요. 각종 병든 자들이요. 귀신들린 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부터 요한복음 까지 샅샅이 한번 뒤져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들 앞에서 욥의 친구들처럼 “네가 왜 그런 고통을 당하는지 내가 설명 해 주마”하고 이유를 말씀하시는 데가 있나요? 없습니다. 4복음서를 하루 종일 뒤져 보아도 그런 데는 한 군데도 찿아볼 수 없습니다. 진정한 위로자는 남의 아픔을 바라보면서. 함께 그 아픔을 눈물로써 감싸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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