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갑자기 찾아온 추위가 도시의 움직임을 얼려 버렸다. 창밖 풍경은 잿빛 하늘 아래 얼음 서리와 고드름뿐, 사람들은 저마다의 요새로 숨어버린 듯하다. 나 역시 모든 일정을 접고 집안에 머물기로 한다. 평소 같았으면 해야 할 일을 못 한다는 조바심에 날씨를 원망했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굳게 닫힌 문 안에서 나는 오히려 낯선 해방감을 맛본다. 그것은 바로 느려진 하루가 주는 뜻밖의 선물이었다.
그동안 가속 페달을 밟는 자동차처럼 달려왔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혹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려 분주히 움직였다. 시계바늘에 일상을 맞춰야 직성이 풀렸고, 비어 있는 시간은 해내야 할 숙제를 미루는 게으름처럼 여겼다. 그러나 혹한이 강제로 멈춰 세운 일상은 그간 잊고 지냈던 '여유의 미학'을 일깨워주었다.
가장 먼저 변한 것은 아침의 풍경이었다. 알람 소리에 놀라 일어나자마자 잰걸음으로 나갈 채비를 하던 긴장감이 사라졌다. 느릿하게 커피를 내리고, 마시기 직전까지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향을 잠시 음미할 수 있었다. 뜨거운 커피를 텀블러에 담기 전 집안에 퍼지는 냄새가 이토록 구수한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속도를 늦추자 비로소 사물의 과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안 벽난로의 온기도 다르게 다가온다. 서재 한쪽에 꽂힌 채 오랫동안 들춰보지 않았던 책들의 제목, 그리고 베란다 화초들이 추위를 견디며 내뱉는 고요한 숨소리까지. 밖으로만 향하던 시선을 안으로 돌리니, 내가 사는 공간이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나의 취향과 세월이 쌓인 소중한 보금자리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느려진 시간은 공간에 온기를 불어넣고, 그 안락함 속에서 내 마음의 주름도 서서히 펴진다.
삶의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게으름과는 다르다. 그것은 중요한 일과 급한 일 사이의 우선순위를 바로잡는 일이다. 며칠간의 고립이 나에게 물었다. 그동안 급한 일들에 치여 정말 소중한 내면의 소리를 외면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빨리 달렸는지 말이다. 정작 도착해야 할 목적지는 마음의 평안이었음에도, 주위의 풍경을 무시한 채 앞만 보고 달렸던 것은 아닐까 되돌아본다.
그렇게 멈춰 선 시간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오랜 시간 보아왔던 분의 갑작스러운 부음을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존재하던 한 세계가 이토록 허망하게 닫힐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떨리는 가슴을 깊은 호흡으로 다시 한 번 가다듬는다. 뒤처지지 않으려 애썼던 급한 일들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실감한다. 어쩌면 가는 길에 핀 꽃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한 번 더 말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생의 끝에서 우리가 가져갈 유일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혹한이 지나가고 나면 내게 남은 세상은 다시 빠른 속도로 회전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 내 나이에는 일상의 속도를 늦추고 삶을 천천히 바라보는 것이 단순히 여유를 즐기는 일을 넘어,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음을 인정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 잠시 멈추었던 시간 속에서 배운 것들만큼은 잊지 않기를 바란다. 찻잔 속의 커피 냄새, 창가에 머무는 잿빛의 농도, 그리고 내 곁을 지키는 사람들의 소중한 숨결까지. 삶의 속도를 아주 조금만 늦춰도 발견할 수 있는 이 작은 즐거움들을 분주한 날들 속에서도 언제든 다시 꺼내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했다. 그 방향을 제대로 보려면 잠시라도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아야 한다. 이 추운 겨울날, 벽난로의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며 이 자명한 진리를 다시금 마음 깊이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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