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우편함에 꽂힌 엽서 한 장이 눈길을 붙잡았다. 낙상 예방 콘퍼런스에서 온 초청장이었다. 그 위에 적힌 “Don't Let a Fall Get You Down (추락이 당신을 주저앉게 하지 마세요)” 라는 슬로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문장에 매료되어 지체 없이 참석 전화를 걸었다.
평소 부모님의 간병에 관한 상담 전화를 자주 받는다. 내용은 대개 양로원을 찾기 위한 행정적인 절차를 묻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대화의 끝은 늘 치매나 낙상 사고를 당한 부모를 부양하는 자녀들의 고단한 하소연으로 맺는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사정을 일일이 듣는 것이 때로는 버겁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절박함과 우울의 농도를 이해할 수 있는 나는 차마 전화를 먼저 끊지 못한다.
골반 골절이 있는 아흔 살 노모를 병 수발하는 육십 대 주부와 통화한 적이 있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메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져 있었다. "효도라는 책임감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어머니가 깨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요."라는 고백에 가슴이 저릿했다.
자식의 도리를 다하려 홀로 모든 짐을 짊어졌던 그녀는, 정작 자신의 무릎 뼈가 닳아가는 줄도, 잠을 잃어버린 눈 밑이 거뭇해 지는 줄도 몰랐다. 덫에 걸린 듯 반복되는 간병의 굴레 속에서 그녀가 만난 것은 지독한 고립감뿐이었다. 바닥까지 탈진한 끝에야 그녀는 비로소 자신을 돌보지 않는 헌신은 결국 모두를 무너뜨리는 위태로운 불균형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있다.
낙상 환자 가족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사고 전에는 참 건강하셨는데, 한 번 넘어지신 뒤로 모든 게 무너졌다"고.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낙상 자체가 건강 악화의 시작이라기보다, 그 이전에 이미 몸의 균형 장애(balance disorder)가 있었음을 인지하지 못했던 경우가 더 많다.
균형 장애란 가만히 있을 때는 평온해 보이지만, 서거나 걷기 시작할 때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증상이다. 75세 이상 노인들이 병원을 찾는 가장 흔한 원인이기도 하다. 노년의 낙상이 유독 치명적인 이유는 환자 본인의 고통을 넘어, 간병하는 가족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앗아가기 때문이다. 상담 전화를 끊으며 늘 깨닫는다. 원하는 것을 정직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때를 놓치면, 결국 마음에도 균형 장애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잡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과정이다. 삶의 균형은 만족과 부족, 기쁨과 슬픔이 조화롭게 순환할 때 찾아온다. 하지만 일상은 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억울함과 분노를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안으로 꾹꾹 눌러 담다 보면, 비대해진 스트레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마음이 균형을 잃는다. 어디 무너지는 게 마음뿐이겠는가 육체의 쇠락도 시간문제다.
추락은 물리적 낙상만을 뜻하지 않는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나를 잃어버리는 모든 순간이 곧 추락이다. 하지만 육체든 마음이든, 예고 없이 찾아올 그 추락이 나를 주저앉히게 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완벽하게 서 있는 상태의 건강이 아니더라도, 비틀거릴 때마다 다시 중심을 향해 몸을 기울일 줄 아는 의지, 그것이 내가 고단한 상담 전화 속에서 찾아낸 삶의 진짜 근력이기 때문이다.
책상머리에 초청 엽서를 붙여 놓았다. 콘퍼런스가 끝나도 엽서의 저 문장을 볼 때마다 나는 내 삶을 각성하게 할 것 같다. “ Don't Let a Fall Get You 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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