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김성희 부동산
첫광고
이규 레스토랑

[수필] 멈춰 선 청춘, 그때 그냥 줄 걸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5-10-14 11:23:21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가을엔 바람이 든다

구양숙 부동산표정원 융자미국 크래딧 교정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저녁 식사 후 소파에 기대 앉아 있던 엄마가 불쑥 혼잣말을 하셨다. “춘성이 생각이 난다.” 한국에 사는 내 친구 중에 같은 이름이 있는 지라 잠시 어리둥절했다. “아니, 엄마가 어떻게 춘성이를 알지?” 하지만 지역적으로나 시간 때로나 두 사람은 절대 만날 수 없었다는 것을 즉시 인지하고 나서는, 슬며시 내 장난기가 발동했다. 

“어머나, 구십이 지난 여인께서 남편도 자식도 아닌 웬 외간 남자의 이름을 부르시나, 혹시 엄마의 옛날 애인이셨나?” 농담 섞인 질문이었지만 엄마의 눈빛이 반짝였다. “마님, 이제라도 회개하시고 속죄함 받으시지요.” 밤잠을 청하기 전에 남은 시간이나 때울 요량으로 엄마에게 장난을 걸었다. “에구, 그때 그냥 줄 걸, 그 까짓 게 뭐라고.” 엄마가 혼자 읊조리셨다. “엄마, 누구한테 뭘 준다는 소리야?” 내 물음에 엄마는 아주 오래 된 상자를 열 듯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춘성이는 엄마 친정 집 마름의 아들이었다. 열아홉 살의 나이에 상사병을 앓다가 세상을 등졌다. 춘성이의 장례 행렬이 엄마 집 앞을 지나가려 했을 때 상여꾼들의 발이 멈췄다. 상여가 움직이질 않았다. 구경하고 있던 엄마에게 춘성이 누나가 다가와서 말했다. “예쁜아, 네 옷가지 아무 거나 하나만 줄래? 우리 동생이 여기를 지나지 못하는 구나.” 

그 말이 어린 엄마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열여섯 살의 엄마 자신이 한 비극의 시작이었다는 걸 깨달았던 찰나였다.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그 기묘했던 순간, 춘성의 죽음에 영문도 모른 채 엮였다는 당혹감, 한 사람의 마지막을 붙들고 있다는 섬뜩함에 돌아서서 집안으로 냅다 뛰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고 했다. 

엄마는 종종 과거 이야기를 하셨다. 6.25 때 피난 생활, 힘들었던 결혼생활, 시집살이 이야기, 나를 키우며 행복했던 날들, 그러나 춘성의 이야기는 내가 들었던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동화였다. “그 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몰랐어.” 이야기를 마친 엄마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셨다. 마치 열여섯 소녀의 수줍음과 세월을 이겨낸 어른의 깊이가 깃들어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엄마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기억했던 것은 과거에 자신을 짝사랑한 춘성이가 아니었음을. 그의 상사병은 엄마에게 죄책감이나 슬픔이 아니었다. 오히려 열여섯 살의 청춘, 그 자체의 증표였다. 망자가 목숨을 버릴 만한 존재였던 어린 엄마 앞에서 상여가 떠나지 못하고 상여꾼들의 발을 멈춰 세웠듯이, 엄마의 청춘도 그 때, 그 곳에 멈춘 채 누구의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단지 ‘예쁜이’라 는 이름으로 불리던 열여섯의 소녀로 숨어 있었던 것일까? 

엄마는 늘 “늙어도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다.”고 말씀하셨다. 당혹감과 두려움에 옷가지 하나 주지 못하고 대문을 걸어 잠그었던 미성숙했던 엄마의 청춘은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온 후, “그 때 그냥 줄 걸” 하는 넉넉한 미소로 마무리 지었을 때 비로소 완성 되었던 것같다. 그래, 어쩌면 몸은 늙어 꼬부라져도 마음은 언제나 청춘일 수 있는 건, 그것은 문 밖에서 상여를 멈춰 세울 만큼 간절했던 누군가의 이름자를 가슴 속에 숨겨 놓은 덕분인지도 모르지. 

언젠가 내 생애가 저물 즈음 되돌아볼 때, 누군가에게 전부가 될 수 있었던 청춘 시절의 기억이 내게도 있을까? 엄마가 작고하시기 두 해 전, 향년 아흔 살 때 해 주셨던 이야기다. 

 

 

 

댓글 0

의견쓰기::상업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등의 코멘트는 예고없이 삭제될수 있습니다. (0/100자를 넘길 수 없습니다.)

[수필] 마음의 필터를 살펴보다
[수필] 마음의 필터를 살펴보다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책을 읽다가 마음이 울리는 문장 하나를 만났다.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마시는 물은 우유가 된다.” 마치 매일 마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우리 집 개가 남을 물었다면, 어디서 보상되나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우리 집 개가 남을 물었다면, 어디서 보상되나

최선호 보험전문인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하면서도 당황스러운 사례가 바로 반려견이 다른 사람을 물거나 다치게 하는 경

[법률칼럼] 입양(Adoption) 영주권, ‘가족’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케빈 김 법무사 2026년 현재 미국 이민 시스템에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입양을 통한 영주권 취득이다.여전히 많은 사람이 “미국 시민권자가 입양하면 영주권이 나온다”고 단순하

[박영권의 CPA코너] 내 세금 신고서, 이미 누군가 제출했다? – IRS ID Theft & IP PIN
[박영권의 CPA코너] 내 세금 신고서, 이미 누군가 제출했다? – IRS ID Theft & IP PIN

박영권 공인회계사 CPA, MBA 세금 신고 시즌이 되면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중 가장 당황스러운 상황은 본인이 신고하지 않았는데 이미 신고가 접수되었다는 통보를

[행복한 아침] 어머니 나라

김 정자(시인 수필가)     이국으로 떠나와 있다는 핑계로 좀 더 안아 드리지 못했고 산다는 것에 짓눌려 자주 찾아 뵙지 못했다는 아스라한 아픔이 되살아 난다. 어머니라는 보호막

[신앙칼럼] 기억과 새 일(Memory and New Things, 빌립보서 Philippians 3:13-14)

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 –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

[재정칼럼] 천경태의 은퇴를 지키는 쇼셜시큐리티 인사이트 : 은퇴와 생활의 기초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제도 읽기(6)
[재정칼럼] 천경태의 은퇴를 지키는 쇼셜시큐리티 인사이트 : 은퇴와 생활의 기초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제도 읽기(6)

“위기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제도, 쇼셜시큐리티의 본질” 천경태 (금융전문가)  공식 게시일: 2026년 4월 17일 (자료 출처: Social Security Administra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선한 의지로 추구하는 삶의 가치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선한 의지로 추구하는 삶의 가치

최 모세( 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베토벤”이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극복하며 추구했던 삶의 참가치는 인간의 존엄성을 귀하게 여기고 정신적 자유와 생명력을 지니는 기쁨이었다.그의

[삶과 생각] 사탄의 발악과 말세
[삶과 생각] 사탄의 발악과 말세

지천(支泉) 권명오 (수필가 / 칼럼니스트) 사람 사는 세상이 너무나 불완전하고 불공평하다. 무질서한 불의가 판을 치며 끼리끼리,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상이다. 생명에 대한 존엄성

[시와 수필] 돌산 나그네

박경자 (전 숙명여대 미주총회장) 천인무성 (千人無聲)침묵 ㅡ 침묵이 답이다 억겁의 세월속에 아프게 달려온 돌산의 답은 그래도 침묵 호수를 껴안은 맑은 물에 물오리가 유유자적  행

이상무가 간다 yotube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