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심리학에서 발견한 인간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한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일지 라도 일정한 시간 내에 절대로 하나 이상의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이 즉석에서 실험 해 보아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내일 일과 어제의 일을 동시에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양쪽의 일을 번갈아 생각할 수는 있지만 한꺼번에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감정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한 가지의 감정에 몰입해 있을 때는 다른 감정과 함께 젖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슬픔이 마음에 스며 들지라도 그 감정이 자신을 지배하기 전에 얼른 다른 일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본래의 상처는 자연스럽게 잊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일에 눈코 뜰 새 없이 열중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을 잊어 버립니다. 하지만 그 일을 마치면 다시 위험한 순간이 다가옵니다. 걱정 근심이 다가오는 것은 여유가 있을 때입니다. 숱한 일상의 의미가 비수처럼 다가오고 세월의 무게와 의심이 스스로를 지배합니다. 여기에 가장 좋은 처방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삶에 자신감을 부여하고 안정된 생활을 되돌려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일에 몰두하는 것 뿐입니다. 건설적인 일에 몰두 함으로써 마음을 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실제로 이런 방법을 정신병 요양소에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 요양소를 방문한 사람들은 가엾은 환자들이 한데 모여 베를 짜고 있는 과정을 보는 순간 퀘이커 교도들에게 노동 착취를 당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환자들에게 가벼운 노동을 시킴으로써 그들의 정신 질환을 완화 시킨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쁜 일 그것은 병든 마음에 가장 좋은 마취약입니다. 그 증거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방법으로 절망과 고통을 이긴 사례에서도 찿아 볼 수 있습니다. 롱펠로우는 어는 날 정원을 산책하다가 집 안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아내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가 정신 없이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아내는 미처 불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그는 이렇듯 갑작스런 사건을 겪자 거의 정신의 공항 상태에 빠져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인생의 과거의 희망을 송두리째 잃은 듯한 슬픔에 눈앞이 캄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슬픔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세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야만 했습니다. 아이들과 산책하고 동화책을 읽어주며 학교에 데려다 주어야 했습니다. 롱펠로우는 일과 가정을 함께 돌보게 되자 한시도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생활이 계속 이어지자 그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추스리고 자신의 일에 자연 스럽게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이 때의 경험을 되살려 <아이들의 시간>이란 시를 남겼습니다. 또 <단테>를 번역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일이 절망을 치유해준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