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이규 레스토랑
김성희 부동산
첫광고

[삶이 머무는 뜰] 헤픈 마음들이 빚어가는 아름다운 세상

미국뉴스 | 외부 칼럼 | 2026-01-08 10:19:30

삶이 머무는 뜰, 조연혜

구양숙 부동산표정원 융자미국 크래딧 교정

조연혜

 

어떤 말들은 빛을 발하는 순간이 따로 있다. 함부로 낭비한다는 뜻의 ‘헤프다’도 그렇다. 저무는 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이 단어가 꼭 있어야 할 자리는 ‘마음’ 곁일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성탄절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타국에 삶을 맡긴 지 2년여, 여전히 어리바리하고 어설픈 것투성이인 나를 세심하게 챙기는 미국인 친구로부터 조금 특별한 초대를 받았다. “크리스마스엔 뭐해요? 난 이맘때면 지인들과 홈 파티를 해요. 당신도 별일 없으면 가족과 함께 와요. 그들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겨울이면 유독 먼 땅에 두고 온 그리움이 눈에 밟혀 쓸쓸해하는 속내를 읽기라도 한 걸까. 그의 말은 화려한 성탄의 불빛 아래 더 초라해지는 빈 가슴을 달래는 참 고마운 제안이었다. 하지만 선뜻 응할 수 없었다. 스무 명 남짓 되는 미국인에게 안면도 없는 동양인이 어떻게 비쳐질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내가 가도 될까요?” 갈등하며 대답을 미루는 내게 용기를 준 건 그의 확신이었다. 그는 내가 승낙할 거라는 진지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이미 약속을 정한 듯 행동하는 그의 태도가 믿음직스러워 고민은 길지 않았다. 호스트도 우릴 반긴다는 소식에 맘이 한결 놓였다. 

화려한 자리가 아니라 더 좋았다. 손수 만든 핑거 푸드를 먹으며 간단한 선물을 교환하는 정도라 부담 없이 참석할 만했다. 그는 선물은 충분하게 준비되었으니 걱정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마 편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낯선 객에게 베푸는 그들의 호의, 그건 우리를 이방인이 아닌 진정한 벗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며칠 뒤 나는 요즘 미국에서 ‘K-푸드’의 대표주자로 각광 받는 김밥을 정성껏 말고, 한국의 전통 간식을 챙겨 약속 장소로 향했다. 사실 많이 떨렸다. ‘공통점도 별로 없는데 과연 잘 지낼 수 있을까?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쭈뼛대다 돌아오는 건 아닐까?’ 일행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 이십 분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작은 가슴에 허락된 용기를 다 소진한 듯 내 자신이 한없이 작게만 여겨졌다.

허나 소심하게 속 태울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그 집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좋은 사람들에게서 전해지는 편안함이 나를 에워쌌다. 어느새 긴장감은 사르르 사라졌다. 그 모임은 마치 내 친구를 닮아 있었다. 하나같이 따스하게 우릴 환대하면서도 호들갑 피우지는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인연을 대하듯 평온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소란하지 않은 분위기 아래 소박한 음식을 나누는 사이 나는 그들에게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거창한 대화는 없었지만 알게 모르게 주고받은 서로에 대한 고마움이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며 가진 선물 교환 이벤트에서도 정다움이 묻어났다. 제비를 뽑아 받은 물건이 별로면 다른 참석자 것을 뺏어도 되는 짓궂은 규칙마저 그들에겐 온기를 불어넣는 장치였다.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주고 트리 아래 놓인 알록달록한 상자들을 흔들어보는 시간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여섯 살인 내 아이가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뽑은 커피는 친구가 가져갔다. 아이는 결국 자신에게 딱 맞는 맛있는 간식을 얻었다. 다소 실망한 아이의 표정을 읽은 그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곳에 모인 모두는 가는 한 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인생의 동반자였다. 그날 처음 만난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살아온 환경이 전혀 다른 세 식구를 가만히 품어주는 다정다감한 파란 눈들과 마주하자 한 책에서 읽은 글귀가 떠올랐다. 세상을 바꾸는 건 위대한 리더도, 거대한 정의도 아니라고, 진심을 건네며 마음을 돌보는 사람, 그리고 지친 이의 등을 살며시 토닥이는 사람이라고. 훈훈한 맘가짐으로 타인을 대할 때 풍기는 진한 인간미는 미처 알지 못해도 늘 곁에 머무는 공기 같은 것이었다.

아낌없이 퍼주는 인정은 20년 넘게 미국에서 사신 큰아버지를 통해서도 전해진다. 1년 전쯤 큰아버지 회사에 한 가정이 이민을 왔다. 이후 큰아버지는 중요한 가족 행사에 그 식구들을 잊지 않고 부르신다. 올해 1월 1일에도 우리는 그들과 함께 세배하고 떡국을 먹었다. 실은 그동안 큰아버지의 행동이 조금 과하다고 생각했다. ‘피붙이도 아닌데 때마다 챙길 필요는 없잖아?’ 그들의 상황을 헤아리기보다 잘 모르는 이들과 한자리에 있으면 어색하고 불편한 내 성격이 앞선 섣부른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번 크리스마스 모임을 통해 내 속이 좁았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큰아버지의 넉넉한 인품이 일가친척 없이 단출히 지내는 그들에겐 얼마나 아늑한 둥지처럼 느껴졌겠는가. 사람을 향해 베푸는 애정은 아무리 쓰고 써도 소모되지 않는 감정인 것을. 끈끈한 정이 모여 만들어지는 따사한 체온을 잊고 내 앞길만 아등바등 챙긴 지난 생활이 부끄러웠다.

그러고 보면 나는 헤픈 마음이 주는 힘을 익히 알고 있었다. 열 번 가까이 본 영화〈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해리는 절친 론과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난생처음 선물을 받는다. 론의 어머니가 그의 이니셜을 새겨 직접 뜬 스웨터. 계단 밑 벽장에서 긴 시간 외로움을 견딘 해리에게 그것은 단순한 옷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인격이란 기쁨이며,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2026년에도 살아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테다. 그러나 우린 혼자가 아니다. 내면은 단단하게 다지면서 다른 이들에게로 흐르는 온정을 꽁꽁 가두지 않는 한 우리는 더 아름다운 미래와 마주할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햇살 같은 심장을 지닌 사람들의 헤픈 사랑이니까.

글/ 조연혜, 프리랜서 편집자

 

댓글 0

의견쓰기::상업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등의 코멘트는 예고없이 삭제될수 있습니다. (0/100자를 넘길 수 없습니다.)

[추억의 아름다운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수필〉우리에게 불행해질 권리는 없다
〈수필〉우리에게 불행해질 권리는 없다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삶의 귀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 '암'이라는 날 선 선고를 받던 그날, 나는 텅 빈 머릿속을 떠다니던 죽음의 공포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65세 미만 장애로 메디케어에 들어간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들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65세 미만 장애로 메디케어에 들어간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들

최선호 보험전문인  메디케어는 보통 65세가 되면 가입하는 연방 건강보험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65세 미만이라도 장애(Disability) 판정을 받고 SSDI(Social

[허니웨이 건강 칼럼] 프로폴리스편 3회- “아이도 괜찮을까요?”
[허니웨이 건강 칼럼] 프로폴리스편 3회- “아이도 괜찮을까요?”

온 가족이 함께하는 프로폴리스 사용법 프로폴리스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아이도 먹어도 되나요?”입니다.가족 모두가 건강을 챙기고 싶은 마음,그 마

[애틀랜타 칼럼] 건전한 불만은 세상을 이끄는 힘

이용희 목사 우리는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한 그 일에서 만족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자연스럽게 일에 적응하고 자신의 인생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만족이란 자신

[내 마음의 시] 영수는 눈먼 영희를
[내 마음의 시] 영수는 눈먼 영희를

월우 장붕익(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비밀 언덕으로어깨를 기대며서로 힘을 얻는다 버팀목으로묵묵히 견디어 낸다 대들보로세월의 무게에도휘어지지 않는다 뼈대있는 가문으로가족을 지킨다 앞

[빛의 가장자리] 얼음위의 고양이들

갑작스러운 한파로 얼어붙은 뒷마당에서 저자는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며 그들의 고단한 삶을 지켜본다. 따뜻한 집 안에서 보호받는 반려견과 대비되는 들고양이들의 처지를 통해 생존의 엄숙함과 생명에 대한 연민을 전하며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희망을 담았다.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이민자 삶의 역경을 이기는 힘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이민자 삶의 역경을 이기는 힘

최 모세( 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지금 이민자 삶이 위기에 처한 그 어느 때보다 대처하기 힘든 상황이 아닌가 싶다.한겨울의 바람 부는 황량한 벌판에 망연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에

[행복한 아침]  진위 여부, 거짓과 진실

김 정자(시인 수필가)   무슨 일이든 양쪽 말은 다 들어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사실 여부를 부풀려서 궁지로 몰아 넣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 저들의 전례 없는 말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이민자 삶의 역경을 이기는 힘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이민자 삶의 역경을 이기는 힘

최 모세( 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지금 이민자 삶이 위기에 처한 그 어느 때보다 대처하기 힘든 상황이 아닌가 싶다.한겨울의 바람 부는 황량한 벌판에 망연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에

이상무가 간다 yotube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