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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상처 씻어 내기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5-05-31 18:18:55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상처 씻어 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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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세탁기가 고장 났다. 세탁실에 내려가 줄 서있는 빨래 통들을 보니 정말 큰일이었다. 며칠 전 폴리에스터 바지가 축 젖은 채로 나와서 이상했는데, 결국 무슨 문제가 터진 게 분명했다. 돈 들어 갈 일이 생긴 것도 걱정이지만, 당장 길 건너 상가에 있는 빨래방을 오가며 세탁할 일을 생각하니, 방금 전 창가에서 커피를 마시며 즐거웠던 기분이 순식간에 싹 달아났다. 

 

도대체 누가 또 고장을 냈을까? 남 탓, 잘못 되면 다 남 탓이라더니, 문득 김 할머니 생각이 났다. 김 할머니는 남편의 은퇴 연금 덕분에 금전적인 형편이 넉넉한 분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 바로 양로원 입소를 신청했지만, 상담 시에 성격이 너무 투박해 보여서 망설였었다. 다행히 건강 상태가 젊은이 못지않아서 혼자 살기 힘들어질 때 다시 오시라는 말로 거절했었다. 그 후에 혼자 사는 게 무서워서 야구 방망이를 머리맡에 두고 잔다는 전화를 받고나서야 양로원 입소를 허락했었다. 

 

할머니의 옷 세탁 방법은 정말 유별났다. 세탁기에 옷과 비누를 넣고 첫 번 세탁이 끝나면, 식초를 넣고 다시 한 번 빨았다. 그러고 나서도 두 번을 헹구었고 꼭 햇빛으로 말려야 했다. 그렇게 해 주어도 쿰쿰한 냄새가 난다, 피부가 가렵다, 땀 냄새가 빠지지 않았다며 불평을 쏟아냈다. 저 할머니를 설득할 것인가 내가 포기할 것인가 망설이다가 결국 포기, 빨래를 손수하라고 했었다. 그러는 사이 고장과 수리를 반복했던 세탁기와 할머니 사이에 벌어졌던 해프닝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그것뿐이랴. 오만 가지 일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는 자신을 빼곤 다 미친 사람들 같다며 이런 곳에서는 못 살겠다고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누구는 발을 질질 끌고 다닌다는 둥. 아무개는 화장실을 거의 5분마다 간다는 둥. 저 사람은 새벽에 몰래 목욕탕에서 빨래했다는 둥. 이 사람은 방금 밥 먹고 또 달라고 한다는 둥, 다른 분들의 일상에 토를 달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던 어느 날, 내 참을성이 폭발했다. "그러니까 저 분들이 양로원에서 와서 사시는 거지요. 그래서 할머니는 건강하시니까 혼자 살다가 더 늙으면 오라고 했잖아요." 즉시 후회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내 말대꾸는 할머니의 성질에 불을 지폈다.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는 나를 원망하며 할머니는 예전에 살던 동네로 되돌아가겠다고 했다. 

 

김 할머니가 사라진 양로원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한동안 우울했다. 순간적으로 평정심을 잃었던 행동이 부끄러웠고, 자식도 없는 할머니를 되돌려 보낸 일이 참 미안했다. 그러나 그런 내 감정은 새발의 피였다. 할머니를 아는 지인을 통해서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내 죄책감은 거의 입맛을 잃을 지경까지 커졌다. 

 

5살에 부모를 여윈 김 할머니는 동네 천덕꾸러기로 자랐다. 식당에서 잡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 열두 살, 눈썰미가 좋았던 탓에 회 뜨는 법을 익혔다. 식당에서 만났던 남자와 잠시 함께 살았지만, 술주정과 폭력으로 가출했다. 미군과 결혼하여 이민을 왔지만 제대한 후 남편은 아내의 벌이에 의존하며 평생 무위도식하며 지냈다. 시댁 식구들의 무시와 차별 속에서 한글조차도 못 읽는 할머니가 미국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그저 생선을 다루는 일 뿐이었다. 

 

할머니를 양로원으로 다시 모셨다. 할머니 몸에서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는 걸 계속 인지시키니 괴상한 세탁법도 사라졌다. 한글을 가르쳤다. 노래방 화면 속 가사를 읽으며 노래도 불렀다. 할머니 인생에 이런 행복한 시간이 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팔자라고 믿고 감수했던 인생사를 하나씩 꺼내놓으며 할머니는 웃음을 찾았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상처들은 씻어내면서 6년을 더 살다가 떠나셨다. 벌써 4년이 지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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