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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오늘은 제가 무수리 할게요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5-05-12 09:39:15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오늘은 제가 무수리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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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눈꺼풀 안에서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것 같다. 지난 밤 전화 소리에 첫잠을 깬 후, 선잠으로 밤을 센 탓이었다. 문제는 강 할머니가 새로 산 스마트 폰이었다. 사용법을 가르칠 때 연습용으로 내 번호를 저장해 준 것이 화근이었다. 

 

머릿속에 솜뭉치가 가득한 느낌으로는 일상을 해낼 수가 없었다. 퇴근까지 버티려면 잠시 눈을 붙여야지 싶어, 의자에 막 등을 기대려는 찰나, 똑 똑 똑 노크 소리였다. 강 할머니가 울상인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원장님, 내가 아무래도 바보 천치가 됐나 봐." 할머니 표정이 서글프다 못해 너무 진지해서 되레 웃음이 터졌다. 내 핸드폰을 하도 부러워하기에, 스마트 폰으로 바꿔드리라고 가족에게 권했던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 어쩌겠나. 

 

전화 걸고 받는 연습을 열 댓번 이상 가르쳤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복사 본을 찍어내듯 반복했어도, 그 다음 순간이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이해하자. 처음 스마트 폰을 배울 때도 터치와 드래그 방법이 얼마나 낯설었던가. 참는 자에게 복이 오나니! 성자의 수행이 팔순 넘은 할머니에게 스마트 폰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쉽겠다. 내 인내심의 한계가 바닥을 치려할 때 즈음, 드디어 할머니가 전화를 걸고 받는 방법을 터득했다. 

 

나를 계속 붙들고 있는 게 미안했는지 문자 주고받는 방법은 다음에 배우자고 했다. 그때 그냥 “네” 하고 냉큼 일어났어야 했다. 풀 죽은 할머니에게 용기도 줄 겸, 유튜브를 틀어준 내 오지랖이라니. 할머니의 애창곡 ‘My way’를 틀자 표정이 돌변했다. 다음은 앤디 윌리암스였다. 그 동영상이 끝나니 'And I love you so' 노래도 듣자고 했다. 세상에나, 깜빡거리던 건망증은 어디로 달아난 걸까?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딱 맞다. 반쯤 감긴 눈에 게슴츠레했던 할머니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입 꼬리가 씰룩쌜룩하더니 광대가 승천할 기세였다. “아니, 간호사로 평생 일하다 은퇴했다더니 혹시 딴따라 했던 거 아니에요?” 이거 웃을 일이 아니었다. 아직 전화기 사용법도 다 익히지 못했는데, 유튜브 동영상 보는 방법부터 배우자고 할 텐데, 이일을 어찌할꼬. 

 

강 할머니는 8년 전에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직후 양로원에 입소한 분이었다. 큰 충격으로 삶의 뿌리가 흔들릴 법도 한데, 자신을 지키려는 의지가 강했다. 통곡해도 모자랄 슬픔을 가슴에 담고서도 차근차근 일상을 잘 지켜나갔다. 부와 명예로 일궈낸 지난 삶의 궤적을 자랑할 만도 하건만 묵묵히 사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감동을 절로 불러냈다. 모든 일에 긍정적인 사람은 자신의 행복도 잘 키워낸다. 

 

노년은 사회적인 역할에서 밀려나 외로움을 느끼는 시기다. 게다가 나날이 약해지는 건강에 지인을 떠나보내는 상실감까지 감당해야 한다. 그런 서글픔 속에서도 인생의 씨줄과 날줄을 잘 엮어가며 활력을 잃지 않고 노년을 사는 것, 그것은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니다. 거센 파도와 맞섰던 자신의 인생이 결국엔 넓은 바다로 흘러갈 것을 알기에, 자신의 방식으로 노년의 그림을 그려낸다. 말년의 삶이 속절없이 흐르는 지금에도 스마트 폰에 도전하는 강 할머니처럼 말이다. 

 

양로원에서 살아가는 모습도 참 다양하다. 찬란한 과거 경력에 매달려 지금의 처지를 가늠하지 못하는 분을 대할 때면 초긴장해야 한다. 15년 경력이 붙은 지금은 나 역시 시니어가 되어 상황을 초연하게 풀어내지만, 초창기에는 교육받은 대로 했다가 불호령을 당한 적도 있었다. 어느 책에서 정신과 의사인 이근후 박사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노년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뭘까요, 라는 질문에 “자신의 분수를 정확히 안다는 것이지요. 사람에겐 자신을 바로 보는 능력이 필요해요.”라는 대답이었다. 

 

며칠 전 새로 입소한 할머니가 점심 숟가락을 놓자마자 “물 없어?” 반말 명령조다. 운동 삼아 움직여서 손수 떠 잡수는 게 규칙이라는 말이 혀끝에서 목구멍으로 유턴했다. “예이” 하고 물을 떠드렸다. “마마, 오늘은 제가 무수리 할께요.” 물론 혼잣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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