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대낮의 악기점은 한산했다. 서너 명의 종업원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나를 힐긋 쳐다볼 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두 주전에 수리 맡겼던 기타를 찾으러 들른 것이 오늘이 두 번째다. 내일은 꼭 기타를 써야 하는 데, 오늘도 고쳐져 있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기타를 맡겼던 장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데, 나를 향해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백인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 What can I help you?" 가까이 다가온 그가 공손하게 물었다. 청년의 태도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 악기점을 들락거린 지 거의 십 수 년이 넘었지만, 종업원이 먼저 다가와서 도와주려는 경우는 처음인 것 같다.
내 손에서 접수증을 받아든 그가 내 기타를 찾아냈다. 기타는 여전히 수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낙심한 내 표정이 딱해 보였는지, 지금 바로 손 봐 주겠다고 했다. 수리를 마친 후에도 요리조리 살피며 거듭 확인을 하고, 튜닝까지 마치고서야 기타를 조심스레 건네주었다. 어디에서든지 맡은 일에 충실하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을 보면 절로 신뢰감이 생긴다.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저리 예의바르게 아들을 키워낸 부모의 교육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수리비를 계산하면서 이 십 불짜리 지폐 한 장을 더 얹었다. 팁이라는 내 말에 쌍꺼풀진 눈이 휘어지도록 입가에 미소가 번졌지만, 금세 손사래 치며 사양했다.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한국어로 또렷하게 말하는 모습에 내가 멈칫하자 그가 덧붙였다. "My mom is Korean“. 아, 그래서 뭔가 느낌이 달랐구나.
언젠가부터 한국식 예절이 몸에 밴 젊은이를 만나면,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왠지 모르게 쓸쓸해진다. 자책감이다. 어쩌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한국의 예절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을까. 사실, 나는 한국의 것들을 간직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었다. 그저 현실에 빨리 적응하는 것만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믿던 젊은 시절의 나는 참 무지했다.
가끔 아이들이 어렸을 적 살았던 집 마당의 풍경을 떠올릴 때가 있다. 휴일이면 잔디 위 뜀박질, 해맑은 웃음소리, 꽃잎 날리던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 풍족한 삶이었다. 물론 그 아이들이 밝고 건강하게 자라 탄탄하게 자립하며 사는 지금 모습도 자랑스럽다. 하지만, 한국 문화가 자리 잡지 못한 아이들의 삶에서 냉랭한 느낌을 받을 때면, 지난 세월 한국의 문화를 가르치지 못했던 것이 참 미안하다.
얼마 전부터 우리 부부의 늘그막 인생에도 새로운 꿈이 생겼다. 따지고 보면, 손자를 두 명이나 안겨준 아들과 며느리 덕분이다. 내 자식에게는 전해주지 못했지만, 손자들에게는 한국의 전통을 알려주고 싶다. 한국학교도 보내고, 국악도 가르치면서 한국인의 정이란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싶다.
물론 손자들의 교육에 관여하려면 아들 내외의 허락을 받아야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면, 그들은 이미 우리 부부의 책략에 걸려들었다. 바쁜 일상의 틈새를 돈이든, 물품이든, 품앗이로든 부모가 작정하고 물심양면으로 꾀는데 넘어오지 않을 자식이 어디 있을까. 두 달 후엔 십 분 거리 근처로 이사 오기로 했단다. 죽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손자에게는 한국의 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한 번 가르쳐 볼란다. 울랄라! 생각만 해도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