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자(전 숙명여대 미주총동문회장)
‘남산의 신선은 무얼 먹고 사는지 밤마다 산중에서 백석차를 끓이네
세상 사람들은 백석이라 부르니
한평생 살아도 돈이 필요 없다네
(추사 김정희 1786-1856)
추사 김정희는 다선 삼매의 경지에 도달한 당대에 해동 제일의 문장가요 대실학자였다. 추사체를 만들어 낸 최고의 명필, 어떤 말로도 추사는 쉽게 정의되지 않는다.
다산 정약용, 초의선사와 더불어 내고향 강진에 유배되어 자신 만의 독특한 서체를 이루어 낸 우리 민족의 역사에 조선 후기의 문신이요, 서화가요, 금석학자였다. 추사 김정희 예술은 시, 서, 화를 일치시킨 고증학을 바탕으로 문신이요, 이조 참판을 역임하기도 했다.
나같은 소인이 감히 추사 김정희 그 경지를 이해 할수도 없지만 난 세상이 하… 시끄러워지면 우리 역사속에 민족의 큰 어른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왔을까…
세상을 떠나 자신만의 독특한 정신 세계를 창조한 옛 어른들의 삶속에서 길 잃은 나그네 심정으로 되돌아가본다. 내 고향 강진 이웃마을 율동에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가 살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파란 만장한 우리 역사 속에 쫓기어 먹을 것 없고, 사람들마저 외면한 가난하고 척박한 유배생활 속에서 동네사람들마저 집의 방문을 부수고 행패가 심했던 그 아픈 유배 생활에서 서로가 사람됨과 높은 학문을 알아차리고 다산 초당에 밤이면 함께 모여 스스로 스승과 제자되어 영욕의 세월을 함께하며 조선 말기의 아픈 조국의 앞날을 혼란한 정치, 문화, 예술의 경지를 맥을 같이했다.
부조리한 역사속에서 백성들의 신음 소리, 고초를 보고, 듣고, 느낀 참된 목민의 길이 무엇인가… 백성들의 신음, 고초를 버려진 유배지에서 보고 느낀 글이, 다산이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한 동기가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버려진 민초들의 아픔을 고백한 책이 ‘목민심서’였다.
추사 김정희 그 유명한 ‘세한도’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 시절 그 추운 유배 시절에 버려진 자신에게 따뜻한 사랑을 잊지 못해 그린 낡은 초갓집에 죽어간 솔을 그린 그림이 ‘세한도’였다. 춥고 배고픔의 노년의 자신의 처절한 모습을 그린 노화가의 모습을 죽어간 솔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지금은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 그 유명한 작품이다. 뜻을 같이한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에도 추사가 직접 쓴 ‘다산 초당’은 유배지에서 만난 그들의 우정을 위해 추사 김정희의 독특한 추사체이다.
추사에게는 잊을 수 없는 우정은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였다. 추사의 급한 성격, 참을 수 없는 분노로 거칠어진 추사에게 높은 예술가의 경지로 이끌어 낸 사람이 ‘초의 선사’ 와 인연이었다. ‘우린 세상을 떠난 뒤에도 다시 만나 새로이 인연을 맺자’ 두사람의 돈독한 우정이 추사의 정신, 높은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데 초의선사, 다산 정약용 만남이 큰 인연이 되었다한다. 가끔 초의선사에게 ‘보고 싶습니다, 편지를 보내고 그리움의 편지는 그 유명한 추사체로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조용한 가운데
혼자 앉아 차를 마심에
그 향기는 처음 같고
물은 저절로 흐르고
꽃은 저만치 홀로 피니라
( 추사의 시 중에서)
그 누구도 모방할 수도 없는 추사의 시, 그림, 글에는 추사의 정신 세계의 뛰어난 경지로 추사 만의 독창적인 서체, 서법, 운필에 추사의 정신세계에 기를 둔 추사만의 예술의 혼은 시, 서, 화 에 추사의 깊은 정신세계가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 인연은 바로 그 사람이 된다’는 말은 유배지에서 만난 인연이었다.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대예술요, 대실학자요, 그 어떤 말로도 쉽게 정의 되지 않는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 눈을 뜨게 한 추사의 인생 여정은 그의 고난의 세월 유배지에서 아픔 속에서 이루어졌다.
감히 추사 김정희 그 높은 예술의 경지를 넘나볼 수나 있겠는가… 내 어린 시절 소꼽장난을 하며 놀던 다산 초당, 바위에 새겨진 ‘정석’이 무슨 사연인지 알기나 했겠는가…
흙은 살아서 그 사람의 혼이 거기 흐른다. 내 조국에 큰 어른들이 남기고 간 맑은 정신이 흙속에 깃들어 살아 숨쉰다. 내 고향 강진 토양에서 만난 그 예술가들의 인연들, 그 유배지의 아픔 속에서 예술가로 승화시킨 내고향 강진, 고향의 흙을 만지며 그 옛 세상으로 돌아가 살고 싶어진다.
맑은 정신으로 산 그 한 사람이 없어 오늘의 내 조국은 길을 잃고 헤맨다. 사람의 가슴에 총, 칼을 휘드리며 정치를 하려는 무서운 지도자들 가슴에는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지를 모른다.
다시 옛 스승 추사 김정희 발자취를 찾아서… 그들의 유배지에서 만난 인연의 사람들 다산 정약용, 초의선사 더불어 추사는 정신 속에 추사만의 독창적인 맑은 정신을 기를 흐르게 한 추사체는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추사의 맑은 정신세계가 숨쉬고 있다.
강진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땅끝마을 유배지에서 아픔과 버려진 삶 속에서 꽃 피워낸 추사 김정희, 대실학자로, 최고의 명필가요, 서화가로, 금석학자로 그의 예술은 사, 서, 화 경지에 이른다. 추사의 예술가의 인생은 유배지에서 만난 초의선사, 다산 정약용과 더블어 꽃을 피운다.
추사는 벼루 15개가 바닥이 나도록 먹물을 갈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예술의 경지를 창조하였고 추사의 스스로 창조한 독창적인 예술의 경지는 그 누구도 추사체, 그림을 모방할 수 없는 추사정신의 추사만의 맑은 정신의 기가 흐른다. 추사는 이조 참판을 역임했고, 그의 예술은 시, 서, 화를 일치시킨 그의 작품세계는 청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에 두었다 한다.
추사가 제주에서 세상을 떠나자 40년 우정을 잊지 못한 초의선사는 ‘우리 저세상에서도 우정의 정을 맺고 살자’제문을 지어 추사에게 바치기도 했다. 그 누구의 글도, 그림도 모방하지 않는 추사의 독특한 필체는 추사체를 탄생시켰고, 불교에 귀의하여 봉은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세상을 떠났다.
남산의 신선은 과연 무얼 먹고 사는지 단 한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없는, 내 조국의 비참하고, 아픈 현실은 지도자들은 처절힌 국민의 심정으로 돌아가 이제는 국민 앞에 머리 숙일 때이다.
조국이 길을 잃고 헤맬 때, 그 맑고 깨끗한 선비들의 맑은 정신세계 그 고전으로 돌아가 거기 숨어 살고 싶어진다. 오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