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 감축 한계 보유현금 바닥,
드러그스토어·시프트 등 무너져
소비재·제조·헬스케어 등 취약
미국 내 ‘조용한 파산’ 바람이 불고 있다. 일부 기업들의 호실적에도 불구하고 소리소문 없이 문을 닫고 있는 기업 또한 급격히 늘고 있다. 미국 시장 내 파산 규모로는 거의 10여 년 만에 최대 규모라는 평가가 나온다.
5일 미국 금융 정보 기업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글로벌에 따르면 올 들어 9월 말까지 미국 기업 516곳이 파산 절차를 밟았다. 이는 전년 같은 기간 파산 신청을 한 기업(263곳)과 비교하면 96% 증가한 수치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를 강타했던 2020년 같은 기간(518곳)에 비해서도 높은 수치로, 2010년 이후 최대로 꼽힌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시작된 경기 침체로 기업들이 저마다 대량 해고 등 비용 감축을 위한 자구책 확보에 나선 지 1년이 지나자 버티지 못하고 파산하는 기업이 속출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조 데이비스 뱅가드그룹 수석경제학자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상이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더 이상 비용 감축으로 효과를 볼 수 없는 기업들이 파산법 제11조 카드를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지난달 들어 파산 현상이 더욱 심화되면서 올 4분기가 기업들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지난달 미국 최대 의약품 체인점(드러그스토어)인 라이트에이드가 33억 달러(약 4조3,000억원)에 달하는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을 신청해 시장에 충격을 줬다.
한때 드러그스토어 업계 강자인 월그린이 인수하려 했지만 미 연방거래위원회(FTC)가 독점 우려에 거부권을 행사한 곳으로, 경기 침체기를 버티지 못한 것이다.
팬데믹 기간 빠르게 세를 확장한 온라인 기반 중고차 판매 플랫폼 시프트도 최근 파산법 11조에 따라 파산 신청을 했다. 누적된 적자로 현금 보유량이 바닥 수준으로 떨어졌고 더 이상 자금을 수혈할 방법이 없다는 판단에 기업 청산 절차를 밟은 것이다. 시프트는 2020년 특수목적합병법인(SPAC) 상장 방식으로 나스닥시장에 데뷔한 후 팬데믹 기간 온라인 차량 판매가 각광을 받으면서 전례 없는 성장세를 구가했다.
하지만 지난해 중고차 시장이 냉각되고 금리가 상승하면서 자금 조달이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가운데도 시프트는 업계 내 점유율 향상을 위해 페어와 칼로츠 등 경쟁사를 인수했지만 이는 회복 탄력성을 낮추는 결과를 빚었다.
파산이 빠르게 늘어나는 현상을 두고 코너스톤리서치의 맷 오스본 총괄은 “지난해와 비교해 이미 두 배 이상의 ‘메가급 파산’을 목격하고 있다”며 “리테일·서비스·제조업 분야에서 파산 속도가 빠르게 늘고 있다”고 짚었다. 이어 그는 “특히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운영 비용 증가와 금리 상승에 따른 채무 변제 부담, 팬데믹으로 인한 타격과 소비자 수요 감소가 맞물려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들고 있다”고 덧붙였다.
경기 회복이 더뎌지는 데다 금리 인상으로 인한 채무 부담으로 수개월 내에 파산 우려가 커지는 기업도 늘고 있다.
포브스에 따르면 비디오 기반 커머스 체인인 큐레이트리테일의 장기 부채는 52억6,800만달러에 달해 몇 달을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거세지고 있다. 미국 내 최대 반려견 용품 체인인 펫코의 부채는 16억2,800만달러에 이른다. 이어 소매 체인인 조앤 스토어(9억7,600만달러), 파페치(9억1,700만달러) 등도 거론되고 있다.
S&P글로벌에 따르면 올 9월 기준 누적 소비재 기업의 파산이 64건으로 가장 많았고 헬스케어가 63건으로 그 뒤를 이었다. 팬데믹 이후 환자 감소로 누적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헬스케어 업계도 대규모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한때 1만7,000여명의 의료 인력을 보유했던 엔비전헬스케어가 파산 절차를 밟은 바 있다. 디지털헬스 기업인 바빌론 역시 8월 운영을 중단했다.
<실리콘밸리=정혜진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