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라면 계보
삼양식품공업이 일본에서 튀김 기계를 수입해 한국 최초의 즉석 라면 삼양라면을 출시했다. 1963년 9월 1일이었다. 사람들이 꿀꿀이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광경을 보고 당시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의 부회장이었던 전중윤 창업주가 라면 개발을 결심했다는 일화가 있다. 오늘날 라면이라면 쇠고기 바탕을 떠올리지만 포장에 닭이 그려져 있듯, 한국 최초의 라면은 닭고기 국물 바탕이었다. 돌이켜 보면 일본 최초의 라면도 닭고기 국물이었으니 영향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여곡절 끝에 국내 생산이 되었고 당시 가격 10원으로 저렴한 편이었지만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명칭 탓에 옷감이라 착각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아무래도 낯설어 즉각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더 알리기 위해 삼양라면은 무료 시식을 벌였고 덕분에 1965년 2억 4천만원이라는 매상을 올린다.
■라면의 춘추전국시대와 롯데라면의 등장 (1965)
삼양라면의 성공은 곧 라면의 춘추전국시대를 촉발했다. 돈이 될 거라는 판단이 서자 온갖 업체에서 라면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1964년 삼양라면의 포장지를 인쇄하던 업체가 풍년라면을 내놓았고 이어 닭표라면, 해표라면, 아리랑라면, 롯데라면 등이 등장했다. 하지만 대부분 6개월 안에 정리되었고 결국 후발주자 가운데서는 롯데공업만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
롯데공업의 승부수는 쇠고기 국물의 라면이었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도가니탕맛의 라면을 연구 개발해 1965년 롯데라면을 출시한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김치 깍두기에는 롯데라면’이라는 광고 문구와 더불어 라면이 끼니 음식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뒤인 1975년, 롯데의 농심라면이 엄청난 인기를 끈다. 당시 인기 코미디언인 구봉서와 ‘후라이보이’ 곽규석을 기용한 ‘형님 먼저 드시오, 농심라면, 아우 먼저 들게나, 농심라면’의 텔레비전 광고가 기폭제였다. 농심라면의 인기에 탄력을 얻어 1978년, 롯데공업은 사명을 농심으로 개명하고 롯데그룹에서 독립한다.
■용기면의 탄생 (1972)
불과 1년의 시차를 두고 한국에도 용기면이 등장했다. 일본에서 1971년, 라면의 아버지인 안도 모모후쿠가 개발한 컵라면을 삼양에서 1972년 3월 7일에 출시한 것이다. 지금은 간편함으로 아예 별도의 장르로 대접을 받는 컵라면이지만 역시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요즘의 컵라면과 달리 직사각형의 얇은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나와 생소한 데다가 가격도 비쌌다. 용기의 제조 단가가 높은 탓에 봉지라면(당시 22원)에 비해 네 배 이상 비싼 100원이었다. 그래서 컵라면은 시장을 바로 확 휘어잡지 못했다. 삼양라면은 1976년, 8월 자동판매기를 서울 다섯 군데와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중심지에 운영하며 판촉을 벌였지만 컵라면은 결국 단종되고야 말았다.
첫 진출에서 운이 없었던 컵라면은 강산이 한 번 바뀔 때쯤 다시 추진력을 받는다. 1981년 10월에 농심에서 사발면을 출시한 것이다. 일본의 사례를 따른 삼양 컵라면과 달리 농심의 사발면은 이름처럼 사발 모양의 스티로폼 용기에 담겨 나와 친숙함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2년 11월, 얼큰함을 가미한 육개장 사발면이 출시되면서 라면계의 지각변동이 또 한 번 일어난다. 순한 국물 사발면에서 가지를 쳐 나온 육개장 사발면이 얼큰함 덕분에 주류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고전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라면 (1982)
1980년대는 라면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이다. 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팔팔한 현역인 라면들이 대거 시장에 등장했다. 농심만 하더라도 육개장 사발면을 비롯해 너구리(1982), 안성탕면(1983), 짜파게티(1984), 신라면(1986)을 출시해 큰 인기를 끌었다. 한편 후발주자인 팔도와 오뚜기도 분발해 각각 비빔면(1984)과 도시락(1986), 그리고 요즘 고전의 반열에 오른 진라면(1988)을 출시했다.
같은 해에 출시된 짜파게티와 비빔면은 라면이라면 국물이 있어야 한다는 선입견에 도전하는 새로운 형식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비빔면의 경우 원래 여름용 계절상품이었지만 반응이 좋아 그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처럼 여러 업체가 고전을 내놓았지만 삼양라면은 문자 그대로 고전했다. 농심이 공장의 입지에서 착안해 내놓은 안성탕면이 히트를 치자 1984년 호남탕면, 영남탕면, 서울탕면 등을 내놓았지만 곧 사라졌다.
■신라면의 아성에 도전장을 던진 라면들 (1996)
1986년에 출시된 신라면은 이제 고전의 반열을 넘어 전설로 자리잡았다. 출시 후 삼십 여년 동안 점유율과 판매율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2012년까지의 통계만으로도 220억개가 팔렸을 정도다. 원래 한국의 라면은 당시 ‘높은 분’의 뜻을 받들어 고춧가루 바탕의 얼큰함을 기본적으로 띠고 있기는 했지만, 이름에서조차 드러날 정도로 매운맛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킨 건 신라면이 처음이었다. 이처럼 신라면이 공전의 히트를 치자 다른 업체에서도 부지런히 아성에 도전장을 던졌다. 오뚜기의 열라면(1996), 삼양 핫라면(1997), 한국야쿠르트의 쇼킹면(1997), 빙그레의 매운콩라면(1998) 등이었다. 요즘 매운라면의 대명사인 불닭볶음면보다 더 매웠던 열라면을 빼고는 현재 모두 단종되었다.
■짜파구리의 탄생 (2004)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등장해 입지를 확실히 굳히고야만 짜파구리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포털 사이트를 검색하면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섞어 끓여 먹었다는 기록을 2004년자로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그보다 훨씬 전인 1990년대에 PC통신 나우누리의 라면 레시피 게시판에 레시피가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다. 2009년에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퍼져 나갔다는 기존의 주장과는 시기를 달리한다. 이처럼 직접 기성품을 조합해 자신만의 맛을 찾는 소비자를 모디슈머(Modisumer·’수정하다’와 ‘소비자’의 합성어)라 일컫는다. 짜파구리는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4관왕의 인기를 얻고 2020년 4월 21일 매운맛을 강조한 ‘앵그리 짜파구리’로 정식 출시되었다가 현재는 큰사발면만 남았다.
■삼양의 절치부심, 불닭볶음면 (2012)
한국 라면의 원조이지만 오랜 세월 후발주자인 농심에게 뒤쳐져왔던 삼양라면이 드디어 옛 명성을 대부분 회복했다. 4400으로 2700SHU(스코빌 단위)의 신라면을 훌쩍 뛰어넘는 불닭볶음면의 폭발적인 인기는 2014년 한 해에만 1억개라는 판매량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후 먹는 행위 자체가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었으며 치즈, 마라, 까르보나라맛 등으로 선택의 폭을 넓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