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얼의 역사
지난해 12월 23일, 농심켈로그가‘시리얼 에코 리필 스테이션’을 롯데마트 제타플렉스점에 열었다. 구매자가 가져온 용기에 시리얼을 담아 무게 단위로 판매하는 방식이다. 제품 가격은 g당 8~13원으로 기존 완제품 대비 20% 저렴하다. 용기를 가져오지 않은 구매자에게는 친환경 종이 봉투와 종이 소재 테이프도 제공한다.
시리얼과 친환경이라니 나름 감회가 새롭다. 시리얼은 정확한 과학적 근거 없이 개발된 19세기의 요양식이었다.
오랜 세월 부침을 겪다 이제 환경친화적인 판매 방식을 내세워 재도약을 시도하다니. 그렇다, 재도약이라고 했다. 마트 선반에 한자리를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시리얼의 성장세는 지지부진하다. 그나마 코로나 시국으로 인한 재택 근무 및‘집콕’이 늘어나면서 요즘 급성장을 겪고 있기는 하다. 2020년 시장 규모가 3,294억 원으로 전년 대비 14% 증가했지만, 한시적 인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늘은 바로 그 시리얼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자.
■시리얼의 기원과 도약
1890년, 찰스 포스트는 미국 미시건주 배틀크리크 요양원에 도착했다. 아내와 딸을 데리고 일리노이를 떠나 캘리포니아와 텍사스를 거친 지 2년 만이었다.
건강 회복을 위해 미 대륙 곳곳을 누빈 여정의 끝이었다. 충만한 사업가적 기질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한 탓이었을까? 진단은 신경쇠약증이었다. 내외의 자극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하여 초조함과 피로가 찾아온다는 후천적 질환이었다.
당시 유행을 타던 병으로, 신체 및 정신적 과로를 원인으로 꼽았다. 병이 유행을 탄다니 웃기는 일이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근거 없는 진단과 병명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19세기에는 모두가 진짜로 받아들인 가운데, 배틀크리크 요양원은 신경쇠약증 치료의 선봉이었다. 원장인 존 하비 켈로그 박사는 미국인의 건강 악화 주범을 차와 커피로 꼽았다.
“심각한 위협”이며 심장질환, 뇌졸중, 조루 등의 원인이라 주장했다. 이런 논리를 앞세워 생활습관의 개선을 통한 치유를 제일 과제로 삼았으니 핵심은 당연히 식생활 재편이었다. 식이요법으로 병을 고치겠다는 의도였고, 동생인 윌 키스와 함께 직접 대체식도 개발했다.
얼핏 보기엔 채식 위주였지만 핵심은 곡물이었다. 종교적 영향을 감안하면 실로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형제는 당시 추앙받았던 실베스터 그레이엄 목사의 추종자였고,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의 영향도 받았다.
실베스터 그레이엄 목사는 18세기 동기상구(同氣相求)와 흡사한 논리로 식이요법을 통한 치료를 주창한 인물이다. 지방을 먹으면 살이 찌고, 먹은 동물의 고기처럼 인간이 난폭해진다는 발상이었다.
그래서 채식 위주의 치유 식생활의 일환으로 오늘날 ‘그레이엄 밀가루’로 통하는 통밀가루도 개발했다. 일반 통밀가루와 달리 배젖, 그리고 겨와 눈을 따로 분리해 전자는 곱게, 후자는 거칠게 갈아 한데 합친다. 1894년, 약간의 우연에 힘입어 구운 옥수수 플레이크(toasted corn flake)가 탄생했다. 모든 시리얼의 조상이자 여전히 현역인 켈로그의 콘플레이크다.
요양과 대체식에도 포스트의 건강은 눈에 띄게 좋아지지 않았다. 켈로그 박사는 “오래 못 살 것이다”는 진단마저 내렸다. 찰스의 부인 엘라는 절박한 마음에 다른 가능성에 매달린다.
이번에는 사이언톨로지였다. 그녀의 사촌인 전문가 엘리자베스 그레고리의 ‘모든 병은 마음에 달렸으니 그저 떨쳐버리고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 된다’는 충고를 받아들였다. 덕분인지 그는 건강을 회복해 배틀크리크 요양원을 떠난다. 그리고 전문가의 조언과 자신의 경험을 아울러 대안 요양원 ‘라 비타 인’을 차린다.
말이 좋아 대안이었지 사실은 배틀크리크 요양원을 베낀 ‘짝퉁’이었다. 이어 커피 대용이자 건강 음료인 포스텀(postum)과 시리얼 그레이프 넛(Grape Nut)을 출시했다. 요즘으로 치자면 공격적인 ‘미투 전략(경쟁사와 유사한 제품을 출시하는 일종의 베끼기 전략)’의 실행이다.
두 제품이 성공하자 그는 라 비타 인을 정리하고 제품 개발과 홍보에 몰두한다. 현재 다국적 종합식품 회사인 포스트의 시초다. 켈로그를 좇아 결국 그는 성공했고 ‘선구자적 모방자’라는 후세의 평가를 받는다.
이처럼 건강식으로 출발했던 시리얼은 간편함에 힘입어 아침식사의 자리를 냉큼 차지한다. 그렇게 시장이 커지고 기업들이 진출해 경쟁이 시작되었고 그만큼 시리얼은 도약한다.
이렇게 시리얼이 도약한 데에는 두 가지 전략이 작용했다. 첫 번째는 각종 캐릭터를 내세운 이미지 마케팅이었고, 두 번째는 설탕이었다. 먹으면 ‘호랑이 기운이 솟아난다’는 등 캐릭터를 등장시켜 각종 영양소를 부각시키지만 실상 맛은 당이 책임지는 ‘투 트랙’의 전략이었다. 덕분에 시리얼은 전 미국인의 아침식사로 부상했고, 오늘날 설탕으로 인해 건강하지 않은 아침 식사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자리를 그럭저럭 굳건히 지키고 있다.
■한국 시리얼의 역사
시리얼은 1980년대에 국내 상륙했다. 1인자인 켈로그는 라면 회사인 농심과, 2인자인 포스트를 소유한 제네럴푸즈는 커피 믹스 제조업체인 동서식품과 손을 잡았다. 1988년에는 매일유업이 첵스의 랄스톤 퓨리나와 함께 국내에 진출했지만 곧 철수했다. 그런 가운데 초콜릿 첵스만 켈로그에 팔려 국내에 판매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시리얼은 본토에서 잘 먹혔던 전략을 활용해 아침식사의 영역에 야금야금 잠입했다.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는’ 콘프로스트나 알록달록한 후르트룹스(국내 판매명 후루트링), 먹고 나면 초콜릿 우유가 남는 코코볼이나 첵스 등이 어린이의 대안 아침 식사로 인식되며 2000년대 중반까지 성장세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이후 본토에서와 마찬가지로 시리얼은 설탕의 존재감 탓에 특히 ‘어린이에게 나쁜 음식’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해 소비 하락세를 겪고 있다. 실제로 국민영양통계에 따르면 3~5세 아이들의 시리얼 섭취 비율은 2013년 16.45%에서 2016년 12.98%로 계속 떨어져 왔다.
한편 성인 시리얼 시장은 원래 간편 아침 식사 시장의 경쟁이 치열한 데다가 높아지는 아침 결식률 탓에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2005년 21.1%였던 아침 결식률이 2016년 기준으로는 26.3%로 증가, 한마디로 아침을 아예 먹지 않으니 시리얼이든 뭐든 성장세를 타기가 쉽지 않은 현실인 것이다.
여기에 같은 곡물 간편 아침 식사 가운데서도 설탕의 존재감이 덜한 뮤즐리나 그래놀라, 오트밀 쪽으로 선호하는 경향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하겠다.
물론 이러한 경향이 아주 논리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트밀이나 뮤즐리는 괜찮지만, 곡물에 꿀이나 시럽을 발라 오븐에 구워 만드는 그래놀라의 당 함유량이나 열량은 시리얼과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리얼이든 그래놀라든, 곡물 간편식의 소비는 여전히 건강이나 환경친화 등의 이미지에 기대고 있다는 의구심을 완전히 떨쳐버리기가 어렵다.
이런 흐름에 시리얼 제조업체는 그동안 이미지를 의식해 줄여왔던 설탕을 다시 늘리고 있다고 한다. 설탕을 줄여서 건강해졌다고 아무리 홍보를 해봤자 안 먹는 이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으므로, 기존의 소비자층만이라도 제대로 만족을 시키겠다는 취지이다.
■봉기하라! 파맛 첵스
파맛 첵스 사건을 살펴보지 않고 한국 시리얼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 ‘대한민국 최악의 부정선거’로 꼽히는 첵스나라 부정선거 논란이 시리얼의 세계에 먹구름처럼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초코 첵스의 제조업체인 농심켈로그는 ‘첵스초코나라 대통령 선거’ 이벤트를 열었다. 그리고 ‘초코맛 체키(기호 1번)’와 ‘파맛 차카(기호 2번)’ 가운데 더 많은 표를 얻은 첵스를 정식 출시하겠다고 공표했다.
초콜릿맛 대 파맛 시리얼이라니, 어찌 보면 상식과 비상식적인 맛의 조합이 맞붙었으므로 초코맛 체키의 압승이 예상됐다. 하지만 막상 투표를 시작해 보니 흐름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이벤트가 인터넷에서 관심을 끌며 2번인 파맛 차카에게로 표가 몰린 것이다. 실제로 중간 집계에서는 체키가 7,032표, 차카가 3만3,709표를 얻어 기호 2번의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됐었다.
그러나 농심켈로그 측에서 중복 투표 등의 이유를 들어 기호 1번 초코맛 체키의 대통령 당선을 발표했으니,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네티즌들 사이에서 부정선거 논란이 일었다.
시리얼과 관련, 국내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끌었던 ‘첵스나라 부정선거’ 소동은 16년이 지난 2020년이 되어서야 일단락 지어졌다. 농심켈로그 측에서 “오랜 연구와 개발 시도 끝”에 드디어 파맛 첵스를 출시한 것이다. “너무 늦게 출시해 미안하다”는 홍보 문구와 함께 등장해 ‘2004년 당시의 부정선거를 인정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 가운데, 농심켈로그 측에서는 “남아 있는 당시 관계자가 없어 정확한 확인이 어렵다”고 밝혔다.
“늦게 출시해 미안하다고 한 것은 요청이 꾸준히 있어 왔음에도 16년이나 걸려 제품을 출시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지난해 9월에는 국산 팥을 썼다는 팥맛 첵스도 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