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바람 부는 제주에서 초록 숲에 빠졌다. ‘올레길’은 관광지 위주로 돌아보는 여행 트렌드를 휴식과 걷기로 바꿔 놓았다.
‘놀멍쉬멍’은 일상보다 더 빡빡하게 돌아가는 여행 일정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올레길이 마을과 마을을 잇는 정감 넘치는 길이라면, 한라산 동쪽 사려니 숲길은 원시의 자연에 한 발짝 더 들어가 포근히 안기는 길이다. 잠시나마 세상사의 모든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연과 물아일체가 되는 길이다.
‘사려니’는 제주어로 ‘살안이’ 혹은 ‘솔안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살’이나 ‘솔’은 신의 영역, 즉 신령스러운 곳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사려니숲은 제주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숲이다. 사려니는 ‘실 따위를 흩어지지 않게 동그랗게 포개어 감다’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한라산 중산간 해발 500~600m의 평탄한 지형을 연결한 이 길을 걸으면 여행객도 숲의 일부처럼 푸근하게 녹아 든다. 숲길은 물찻오름, 말찻오름, 괴평이오름, 마은이오름, 붉은오름, 거린오름 등 한라산의 여러 기생화산 주변을 돌아 나간다. 원래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지는 길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지만 일반적으로 많이 이용하는 트레킹 코스는 오름과 연결되지 않는다. 사려니오름까지 산책로는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개방한다.
보통 렌터카를 이용하면 남조로 붉은오름 입구에서 출발한다. 반대편 출입구인 비자림로에는 주차장이 없기 때문이다.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로 들어서면 곧장 울창한 삼나무 숲이다. 사계절 푸르름을 자랑하는 삼나무는 외피가 검붉은 색이지만, 이 숲의 삼나무는 초록 기둥이다. 마치 초록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려 놓은 듯, 숲 전체가 짙은 초록이다. 넓게 퍼진 가지와 풍성한 잎은 볕이 들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다. 안개비라도 내리면 푸른 물이 뚝뚝 떨어져 내릴 듯하다. 조금만 걸어도 산뜻한 초록에 흠뻑 젖는다. 몸도 마음도 ‘신성한 숲’의 일부로 흡수된다. ‘힐링’ 또는 ‘치유’라는 표현이 이 숲에선 오히려 촌스럽게 느껴진다. 제주에서는 일찍부터 산림녹화사업으로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을 조성해 왔다. 감귤 밭 주변에도 방풍림으로 심곤 했다. 사려니오름을 중심으로 한 이곳 삼나무 숲은 1930년대부터 조성했다고 하니 곧 100년을 내다보고 있다.
사려니 숲길의 주 산책로는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다. 대부분 화산재가 섞인 흙 길이지만, 하천과 만나거나 다소 경사진 구간은 시멘트로 포장했다. 그러나 편한 길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쭉쭉 뻗은 삼나무 사이로 여러 갈래 미로를 조성해 놓아 숲의 공기를 흠뻑 들이킬 수 있다. 모든 길은 다시 넓은 길과 만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환상적인 초록에 이끌려 한참을 걸으면 인공조림이 아니라 한라산 본래의 식생과 만난다. 아직 잎이 나지 않아 구분하기 어렵지만, 사려니 숲길에는 서어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 단풍나무, 윤노리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천연림을 형성하고 있다. 짙푸른 덩굴 식물들이 가지를 휘감고 있어서 겨울에도 그리 삭막하지 않다. 바닥은 천남성, 꿩의밥, 새우난, 좀비비추, 풀솜대 등의 야생 초본과 석송, 관중, 고비, 고사리 등 양치식물들이 뒤덮는다. 2002년 유네스코 제주 생물권보존지역에 포함된 사려니숲에는 78과 254종의 식물이 분포한다고 알려져 있다.
봄이 이른 지금은 숲길 양편에 심어 놓은 메마른 수국 꽃잎 정도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인데, 일부 구간에는 바람에 일렁이는 조릿대 물결이 싱그럽다. 조릿대는 쌀을 이는 기구인 조리를 만드는 재료인데, 제주에서는 큰 가뭄과 역병이 돌 때 구황식물로도 이용했다고 한다. 요즘에는 왕성한 생명력으로 한라산 중산간 지역을 빠르게 장악하고 있어 골칫거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바닥을 빼곡하게 덮어 다른 식물의 생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산책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길을 잃기 십상인 이 원시림에도 주민들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다. 숲길 곳곳에서 현무암으로 묘지를 두른 ‘산담’을 볼 수 있고, 어둑어둑한 숲 사이로 목장 경계용 담장인 ‘잣성’도 보인다. 산담은 방목하는 말이나 소가 묘를 훼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쌓았다. 한편으로 늦가을에 목초지를 태우는 ‘방애불’의 피해를 막는 역할도 한다. 산담 안에는 망자의 시중을 드는 동자석을 세우기도 하는데, 사려니 숲길의 무덤에서는 볼 수 없었다.
이렇게 쉬엄쉬엄 걸어 약 절반 지점에 이르면 물찻오름(水城岳) 입구다. 정상 ‘굼부리(분화구)’에 연중 검푸른 물이 넘실거리고, 1km에 달하는 오름의 둘레가 ‘잣(城)’과 같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는데, 제주어에 익숙하지 않은 외지인에게는 어감이 한 번에 와 닿지 않는다. 산책로에서 오름 전망대까지는 왕복 약 1.4km, 50분 정도 걸린다. 현재는 자연휴식년제로 출입 통제 상태이고 ‘사려니숲 에코힐링’ 행사기간에 개방한다. 지난해 행사는 5월 27일부터 11일간 열렸는데 올해는 아직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다. 행사 기간에는 숲 속 클래식 공연과 인문강좌, 숲 치유 프로그램 등이 열린다.
사려니 숲길은 땀을 흘리거나 숨이 찰 정도의 경사가 없이 대체로 순탄하다. 물찻오름 입구까지는 완만한 오르막이고 이곳을 지나면 내리막이라 걷기가 한결 수월하다. 낙엽활엽수와 조릿대로 덮인 구간을 터벅터벅 걷다 보면 출구를 얼마 앞두고 제주도에서 가장 긴 하천인 천미천 계곡을 만난다. 한라산 해발 1,400m 어후오름 부근에서 발원해 표선면 하천리까지 이어지는 25.7km 하천이다. 시멘트로 포장한 산책로가 보 역할을 해 자연스럽게 물이 고였다. 빗물이 바로 지하로 흘러들어 마른 하천만 있는 제주에서 보기 드문 모습이다. 비가 많이 오는 날 사려니 숲길을 통제하는 이유도 바로 이 하천 때문이다.
천미천과 비자림로 출입구 사이에는 ‘새왓내 숲길’이라는 약 1.5km 순환 산책로를 조성해 놓았다. 사려니 숲길 전체 구간은 약 10km로 넉넉잡아 3시간가량 걸린다. 전 구간을 걷기 힘들면 붉은오름 입구의 삼나무 숲길이나 이곳 새왓내 숲길만 걸어도 좋다. 숲길을 빠져 나오면 비자림로 양편으로 또 삼나무가 빼곡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 트레킹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곳에서 붉은오름 입구 주차장으로 돌아가려면 약 1시간마다 운행하는 232번 버스를 타면 된다. 시간이 촉박할 경우에는 택시를 불러야 하는데, 요금은 1만3,000원(카드결제) 정도다.
<제주=최흥수기자>
사려니 숲길 삼나무 숲 구간. 넓은 산책로와 연결된 미로를 걸으면 이끼를 잔뜩 머금은 숲에서 초록 샤워를 하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