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작성 안하면 대개 재산 50%씩 분할
‘이혼전제’ 힐난도 있지만 효율적 장치로 활용
젊은층 사이에서는 서서히 인식 변화 커져
‘혼전 계약서’((pnuptial agreement), 결혼하기 전 결혼생활 시 규칙, 이혼 시 재산분할 등에 관한 것을 규정하는 계약의 제반사항을 기재한 문서다. 사람에 따라서는 약간 생뚱맞고 거슬리기도 하는 단어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일. 한시라도 못 보면 죽을 것 같던 상대가 어느 순간 세상에서 가장 미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의 이중성이다. 혼전계약서를 쓴다고 해서 이혼을 전제한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결혼생활을 성실하고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효율적 장치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혼전계약서의 이모저모에 대해 알아본다.
▶재산분할 논란 사전 예방
미국에 살고 있는 B씨는 몇 년 전 결혼하면서 변호사를 두고 혼전계약서를 썼다.
“최대한의 노력으로도 결혼 유지를 할 수가 없을 때, 논란이 될 수 있는 금전적인 부분에 대해 미리 정리를 해두어서 서로 바닥까지 보이는 것은 막자라는 취지”에서였다. “혼전계약서를 쓰면서 결혼하기 전에 서로 나눠야 하는 여러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이런 혼전계약서가 낯선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결혼 전(pmarital, pnuptial) 작성하는 부부 쌍방의 계약서로, 결혼 종료시 재산 분할에 대한 내용을 담는 문서를 말한다. 이혼을 해야만 법적 효력이 발생하는 문서다.
혼전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주가 이혼할 때는 재산의 50%씩 나누어야 하지만, 혼전 계약서를 혼인 전에 미리 작성한 경우 혼전계약서에 근거해서 재산을 나누게 된다.
예를 들어 ‘혼인 전의 재산은 각자의 소유로 하고 혼인 이후 늘어난 재산만 나눈다’고 계약을 하게 되면 그대로 효력을 발휘한다.
B씨는 이런 점을 들어 오히려 한국의 친구들에게도 이왕이면 혼전계약서를 쓸 것을 추천하고 있다.
▶'2번 이혼' 트럼프 재산 지켜줘
미국에서는 특히 재벌이나 할리웃 스타들 사이에서는 이런 혼전계약서가 일반화되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이 혼전계약서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는 부동산 재벌로서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3번의 결혼과 2번의 이혼을 겪을 만큼 순탄치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을 상당 부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혼전계약서'였다. 트럼프는 세계적인 부호들이 배우자와 이혼한 뒤 파산하거나 경제적 손실을 감내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혼전계약서의 중요성을 체감하게 된다. 그래서 혼전계약서는 결혼의 전제조건이었다.
트럼프는 첫 번째 부인 이바나 트럼프와 1992년 이혼할 당시 위자료로 2,500만 달러을 지급하는 데 그쳤고, 두 번째 부인 말라 메이플스와 이혼할 때는 500만달러만을 지급했다.
자산규모가 85억달러에 달하는 트럼프가 당시 혼전계약서를 쓰지 않았다면 부동산을 포함한 재산의 절반을 위자료로 지급해야 했지만 그는 이를 피함으로써 재산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과 사정 다른 한국
한국의 100억대 자산가 A씨는 결혼 전 아내 될 사람과 혼전계약서를 쓰고 싶어 변호사를 찾았다. 혹시라도 이혼시 발생할 재산분할에 대한 분란을 없애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A씨가 특유재산(결혼 전부터 가진 고유재산과 혼인 중 자기 명의로 취득한 재산)은 한 푼도 안 주겠다는 야박한 계산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다.
결혼생활 3년 후 이혼시 수억원을 지급하고 햇수가 늘어날수록 금액도 제법 크게 비례하는 내용으로 오히려 변호사를 놀라게 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초안은 빛을 보지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결혼하기 전에 이혼부터 전제하고 있냐는 힐난을 받을 것이 너무 뻔해 도무지 신부 앞에 들이밀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혼전계약서 쓰고 싶은데…”
한국의 경우 지난해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간통죄가 폐지된 이후 필요성이 제기되던 혼전계약서는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처럼 유명인사들의 불륜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언급되는 단골 소재.
사랑과 돈이 반대말은 아니라는 명확한 인식의 변화는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한국의 한 결혼정보업체가 25~39세 미혼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혼전계약서가 필요하다는 응답자는 53.1%로 절반을 넘었다. 그 중에서도 나이가 많아 소득도 높을 가능성이 있는 35~39세 연령대에서 56.6%로 가장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혼인계약서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실제 계약서를 쓰기 위해 변호사를 찾는 예비부부는 아직 많지 않다는 게 가사 전문 변호사들의 전언이다. 드러내놓고 돈 문제를 거론하기 꺼려하는 한국 특유의 사회문화와 법적, 제도적 장치 미비로 쓰고 싶어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미국의 혼전계약서가 이혼시 재산분할의 내용만 담고 있는 데 반해 한국의 예비부부들은 부부생활 수칙 등 보다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도 차이다.
다만 주의할 것은 재산과 관련된 조항과 기타 조항이 법적 효력을 갖기 위한 조건이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혼전 계약서는 부부 재산 약정을 근거로 작성하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해지나 내용의 변경이 불가능하다.
다음은 전문가들이 조언하는 작성팁이다.
우선 당사자들의 인적사항을 정확하게 기재해야 하며 당사자들이 서로 협의하여 계약 조건을 작성하도록 한다. 또 재산분할에 관한 사항을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작성하면 무효 처리가 되므로 주의하도록 한다.
해당 계약 성립의 증명과 계약 내용의 위조와 변조 방지를 위해 당사자들은 서명날인하여 각각 1통씩 보관해야 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혼전계약서가 오히려 결혼생활을 성실하고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효율적 장치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뉴욕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