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부터 미 대륙 개척까지
에세이집 '코리언 아메리칸 아리랑' 출판기념회 연다
누군가의 삶은 그 자체로 역사가 된다. 아흔의 고개를 넘어서도 여전히 '애틀랜타의 영원한 현역'이라 불리는 권명오 선생.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 전쟁의 포화를 뚫고, 태평양 건너 낯선 땅에 한인 사회의 기틀을 세운 그의 90년 일대기가 에세이집 '코리언 아메리칸 아리랑'으로 피어났다. 본보(한국일보)에 5년간 칼럼을 연재하며 노익장을 과시해 온 권 선생을 만나 파란만장했던 생의 궤적을 짚어보았다. <편집자주>
Q. 구순의 나이에 474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회고록을 내놓으셨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제 인생은 굽이굽이 험난했던 아리랑 고개였습니다. 1932년생인 제게 조국은 늘 시련이었지요. 일제 치하에서 자라 6·25 전쟁터에서 생사를 넘나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리랑'의 의미를 달리 해석했습니다. '아(我)는 진솔한 자아, 라(羅)는 세상을 다스리는 지혜, 랑(朗)은 끝내 잃지 않는 즐거움'이라 믿었지요. 그 마음 하나로 한국에서의 38년, 미국에서의 52년을 버텼습니다. 이번 책은 그 고개들을 넘으며 제가 불렀던 희망의 기록입니다."
Q. 한국 초창기 연극영화학도로서 문화예술에 쏟은 열정도 대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2기생이었으니,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던 시절이었죠. 최불암, 강부자 같은 쟁쟁한 후배들과 소극장을 만들고 '햄릿'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돈이 없어 등록금이며 반지까지 전당포에 맡겨 무대 세트를 만들었지만, 단 한 번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군 복무 시절에도 위문 공연을 다니며 연극의 씨앗을 뿌렸고, 그것이 훗날 미국 이민 사회에서 연극협회를 일궈낸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Q. 1974년 이민 후의 삶은 그야말로 '사투'에 가까웠습니다.
"1974년, 서른여덟의 나이에 미국에 도착했을 때 제 손에는 기술도 돈도 없었습니다. 볼티모어 가구공장에서 유대인 사장 밑바닥부터 일을 배웠고, 뉴욕에서는 레스토랑의 모든 궂은일을 도맡으며 살아남았습니다. 가장 드라마틱했던 건 휴스턴 대형 쇼핑몰 입점기였죠. 인종차별과 냉대 속에서도 밤을 새워 직접 도면을 그려 건축과를 설득하고, 때로는 재판장에서 법적 투쟁까지 마다치 않으며 한인 상인의 기개를 보여줬습니다. 그때의 독기와 정직함이 오늘날 애틀랜타 정착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Q. 애틀랜타 한국학교에 봉사를 많이 해 오셨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뿌리 없는 나무는 없습니다. 미국 땅에서 우리 아이들이 코리언 아메리칸으로서 당당히 서려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한국학교 섬김에 온 생을 던진 이유입니다. 이번 책도 우리 1세대가 어떻게 피땀 흘려 이 땅에 자리를 잡았는지 후세들에게 '유언'처럼 남기고 싶어 쓴 것입니다. 바람이 있다면 조만간 영문판을 내어 우리 손주들에게 할아버지의 진심을 직접 전하고 싶습니다."
Q. 마지막으로 5년간 칼럼을 애독해주신 한국일보 독자들과 한인 사회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지난 5년, 한국일보에 칼럼을 쓰는 시간은 제 인생의 황금기였습니다. 구순의 노병에게 귀를 기울여준 독자들 덕분에 제가 더 젊게 살 수 있었지요. 한인 사회에 부탁하고 싶습니다. 서로 시기하지 말고 배려하며 어우러져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가 될 때 이곳 미국에서 진정한 아리랑의 환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오는 16일, 제 인생의 작은 축제에 오셔서 함께 축복해주시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제인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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