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원(애틀랜타 거주)
프로이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두 가지 욕동(instinctual drives)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삶의 욕동인 리비도(성 에너지)와 죽음의 욕동인 타나토스(공격적 에너지) 라고 한다. 그 당시 프로이트가 리비도에 대한 이론을 발표하자 그를 금욕주의자라고 몰아세워서 자신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고귀하고 도덕적이어야 할 인간을 성욕 덩어리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성 에너지 라고해서 꼭 남녀 간의 성적인 것 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내 자신이 취하는 작위(作爲)가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남보다 더 낫게 보이려는 모든 행동이나 말들, 다시 말해서 운동을 해서 몸짱이 되고 싶은 욕구 또는 성형수술을 해서 자신의 얼굴을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 또는 책을 많이 읽어서 남들과 대화할 때 자신의 지적 수준을 높이고 싶은 충동, 돈을 많이 벌어서 원 없이 써보고 싶은 욕망, 심지어는 다이어트를 열심히 해서 몸을 S라인으로 만들고 싶은 것 등등을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란 존재의 상품가치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들 즉 내 자신을 돌보는 내면적인 노력이 곧 리비도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타나토스는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중요한 원동력인데 공격성이 너무 부족한 사람은 매사에 의욕이 없고 삶의 진지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며 치열한 현대사회에서 살아남기가 매우 힘들게 된다는 것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약간의 공격성이 필요한데 이런 공격성이 너무 지나치면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대인관계를 망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최초로 국제 정신분석학회가 인증한 프로이트 정신분석가로 인정받은 정도언 정신과 의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위에서 보면 때로는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타인을 공격하게 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지나친 공격성의 뿌리에 자기애적 분노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을 사랑하고 지키려고 하는 것인데, 만약 그 공격성이 남에게 분출되지 못하고 방향을 돌려서 자신을 향하게 되면 우울증에 빠지고 심하면 자해 혹은 자살로 이어진다고 한다. 성욕이나 공격성이 반드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좀 자세히 보면 상대방의 아주 작은 눈빛이나 사소한 몸짓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낼 수가 있고 직장이나 학교에서 별거 아닌 것을 가지고 자꾸 시비를 거는 것도 공격성의 표현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이 사는 모습을 자세히 보면 인간을 움직이는 에너지가 그 방향이나 결과와 관계없이 성 에너지와 공격성을 모두 함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모두는 무의식의 욕동에 종속되어 살아 간다는 사실이다. 성 에너지와 공격성이 상징하는 탄생과 파괴, 사랑과 증오는 늘 팽팽한 긴장관계에 있다고 하는데 그 균형이 무너지면 삶이 고달파지고 힘들게 된다고 한다.
붓다는 인간의 고뇌를 8만4천 가지라고 해서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졌다고도 하고 한편으로는 붓다가 35년 동안 설법을 한 것이 8만4천 가지라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만큼 호모사피엔스는 복잡한 두뇌를 가진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일체유심조라고 말했다. 사실 불교는 종교라기보다 자신의 마음을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관찰하는 심리학 또는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에 의하면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로부터 진화해서 세계 도처로 퍼져 나갔다고 하는데 6백만 년 전 94% 의 유전자를 공유한 침팬지와 사피엔스의 공동 조상으로 부터 갈라진 이후 1백50만 년에 1%씩 침팬지의 몸과 두뇌가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했다고 한다. 그래서 포유류 동물이 6백만 년 동안 진화해온 기억이 우리들의 두뇌에 모두 축적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있는 사실은 보통 인간은 전체 뇌 용량의 8퍼센트(맥시멈 10%) 정도만 사용하면서 살아가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무의식의 세계에 잠겨 있다고 하는데 깊은 명상이나 참선을 통해서 그 무의식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전세계 78.8억의 인구가 생김새가 각기 다르고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전자도 모두 다르며 성격도 또한 각기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공생(symbiosis)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즉 각자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 최초로 배아줄기세포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시각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로버트 란자(Robert Lanza) 박사는 Beyond Biocentrism( 생물중심주를 넘어서)이란 책에서 인간의 권리나 필요가 다른 생물이나 동물 심지어는 나무나 돌 같은 것보다 우선하는 것은 아니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다. 이제 인류는 너와 나 자연과 인간 식물과 동물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둘이 아닌 하나라는 자각을 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란자 박사는 이것만이 우리가 시들어가는 이 행성을 살릴 수 있는 21세기의 구원론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호모 사피엔스는 너와 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자각이 필요한 절체절명의 시기가 아닌가 한다. 리처드 파인만은 과학의 세계를 알고 나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무는 공기로 만들어졌는데 불에 타고나면 다시 공기로 돌아간다. 탈 때의 연기에서 열이 발생하는데 그건 태양열이다. 그런데 그 태양열은 다시 나무속에 공기로 전환된다. 정확한 공생의 원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