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뉴욕의 이사도라 덩컨 발레단의 무용수, <스테파니 바스토스>는 의족의 무용수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17살 때 불의의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장애인입니다. 6세때부터 발레를 시작한 전문 무용수였지만, 한쪽 발을 잃은 <스테파니>를 보며 사람들은 그녀가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나는 노력으로 재기에 성공하여 지금은 동료들에게까지 존경받는 <최고 무용수>가 되었습니다. 스테파니 바스토스가 이렇게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덕분입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잃은 것은 오른쪽 발목 하나뿐이란다. 의족으로 사람들에게 멋진 춤을 보여줄 수 있겠니?” 바로 이 용기의 말, 격려의 말로 인해 그는 장애를 극복하고 당당하게 일어서서 전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절망과 희망의 차이는 백지 한 장 차이임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였습니다.
말은 선한 말과 악한 말이 있습니다. 선한 사람이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이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고, 악한 사람이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이 악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이사야 50장 은 <고난의 종, 메시아>의 장차 다가올 미래를 미리 보여준 예언의 말씀입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특별히 십자가의 고난을 맞이하는 메시아는 고난을 <담담하게, 당당하게> 맞이하실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고난의 종,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맞이하게 될 때도 말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보여주십니다. 학자의 혀는 “말하다”의 동사를 전제합니다. “말하다”는 뜻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말하는 것을 듣다”는 것과 “말하는 것을 배우다”는 뜻이 있습니다. 말하는 것을 듣고, 말하는 것을 배우는 자를 예수님은 “제자”라 부르십니다.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말씀에서 나는도다”고 <학자의 혀>를 구체적으로 실천적인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이사야은 학자의 혀를 강조하면서 <혀>와 <귀>를 동시에 전하였습니다. 왜 혀와 귀를 동시에 전하였을까? 스스로 자문하면 우리는 금새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학자는 듣는 귀가 말하는 혀보다 더욱 중요함을 시사합니다. 들음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관계가 개선된다는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지만, 언제나 상대방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디메오의 아들, 거지 바디메오가 부르짖는 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무시하고 외면하면서 그 곤고한 자의 말하는 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때, 주님께서는 그 부르짖는 자의 간절한 절규에 귀를 기울여 들으셨습니다. 학자의 혀를 가진 자는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줌을 아는 자”라고 이사야는 역설하였습니다(사 50:4).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첫 번째 대상도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복음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복음이 전해질 첫 번째 대상은 바로 <곤고한 자>입니다. 학자의 혀는 바로 이 가난하고 굶주린 자에게 말로써 도와줄 줄을 알라고 하는 것이 예언자 이사야와 메시아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통점입니다.
“참 말인가? 필요한 말인가? 친절한 말인가?”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복음을 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학자의 혀가 무엇인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가련하고 곤고하고 굶주린 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선한 말, 아름다운 말, 격려와 용기의 말>입니다. “학자의 혀를 내게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