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의 당선을 예측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언론들 대부분은 힐러리 클린턴의 낙승을 전망했다. 이들이 트럼프 당선 가능성을 낮게 본 이유는 트럼프가 워낙 많은 스캔들로 얼룩진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힐러리 클린턴으로서는 트럼프의 스캔들을 부각시키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승리할 수 있다는 강한 유혹을 느꼈던 것 같다. 자신의 외교·안보 정책 구상을 밝히는 유세 자리에서 자신의 구상을 적극적으로 밝히기보다 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지를 부각시키는 데 집중했다.
공격할 호재들이 너무 넘치다 보면 사실 그러지 않기도 힘들다. 실제로 트럼프 대학 관련 의혹이 제기됐을 때 힐러리는 “트럼프는 사기꾼”이라고 맹비난했다.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정치 분석가들은 스캔들에 기댄 캠페인에 너무 집중할 경우 자칫 대선 판이 ‘트럼프스럽게’ 흘러가면서 힐러리가 이 페이스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결과적으로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됐다, 그 어떤 의혹이나 추문도 트럼프를 낙마시키지 못했다. 힐러리와 언론은 대중들 사이에 트럼프에 대한 ‘태도면역’이 형성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태도면역은 상대의 어떤 태도가 반복될 때 점차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을 말한다. 스캔들도 마찬가지다. 이를 반복해 접하다 보면 무감각해 지게 된다. 일종의 굳은살이 생기는 것이다.
이와 함께 스캔들의 영향이 미미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정체성 기반’(identity-based) 갈등 모드의 영향이다. 정치적 신념을 정체성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해준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을 둘러싼 불편한 진실이나 스캔들 따위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 수호를 위해 싸워주고 있는지 여부만이 중요할 뿐이다.
윤석열이 대권도전을 선언하고 정치판에 뛰어들었을 때 많은 국민들은 그의 높은 지지율이 거품처럼 곧바로 꺼질 것이라 내다봤다, 하지만 이들의 ‘희망 섞인’ 전망과 달리 윤석열은 100일이 넘은 지금까지도 줄곳 야권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를 둘러싼 자질 논란과 실언, 망언 등을 고려할 때 이해하기 힘든 지지율이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가 훌륭한 정치인이 되어 줄 것을 기대하는 게 아니다. 검찰총장 재직 시 권력과 대립각을 세워온 그를 통해 “문재인 일당을 손봐야 한다”는 응징심리를 해소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정치인으로서의 자질과 하자 따위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이다.
도덕성 논란과 대장동 의혹 속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재명 경기지사도 마찬가지다. 그는 ‘싸움닭’ 스타일의 정치인이다. 언행에 거침이 없다. 그래서 그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국민들도 적지 않지만 지지자들은 그를 보수극우 세력과 맞장 뜰 수 있는 강단을 지닌 정치인으로 여긴다. 그런 기대 심리가 그에 대한 견고한 지지로 연결된 것이다.
정치가 날로 양극화되면서 국민들이 거칠게 몰아붙이며 상대를 파고드는 ‘인파이터’를 자신의 진영을 대표해 싸워줄 선수로 선호하는 현상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의 개인적 흠결 같은 것은 전혀 따지지 않은 채 거의 맹목적인 지지를 보낸다. 악재들이 잇달아 터져도 지지율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 ‘언터처블’이라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서 선거판은 이미 혼탁한 진흙탕 싸움이 되고 있다. 양 진영 후보가 결정된 후 시작될 본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역대 급 네거티브 선거가 될 것이 확실하다. 내년 3월 중립적인 유권자들의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이 한층 더 중요해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