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자(숙명여대 미주총회장)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
오늘밤은 푸석푸석 눈이 내린다
나타샤 사랑 못잊어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촐촐히, 촐촐히
여우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어느날 법정 스님을 어느 여인이 찾아왔다. 백발의 그 할머니는 법정스님 앞에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스님, 이 돈으로 절을 지어 주세요’라며 머리를 숙였다. 원래 대쪽같은 성격의 법정은 그녀의 말에 단호히 거절을 했다. “나보다 훌륭한 고승을 찾아가 보시오”라며 그녀를 돌려 보냈다. 이듬해 그녀는 다시 법정 스님을 찾아왔다. 그녀는 “스님, 절을 지어 주세요” 간곡한 부탁을 했다. 평소 ‘무소유’로 사신 스님은 깊은 산골 강원도 원주민이 버리고 간 작은 오두막에 산새들과 이름 없이 피고 지는 들꽃 더불어 사시던 터에 절을 짓는다는 것 자체가 더없는 부담이었다하셨다. 우여 곡절 끝에 ‘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중생을 위해 머물다가는 나그네들의 쉼터’로 그뒤 ‘길상사’라는 절이 지어졌다. ‘길상사’에는 ‘밝고 아름다운’ 모임,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쉬어가는 바람 같은 집이라 스님은 말씀하셨다. 그때 그 할머니가 내놓은 거액의 돈은 ‘천백 억이 넘는 거액’이었다. 그녀는 천재 시인 ‘백석의 숨겨진 여인’이었음을 - 알게 되었다. 백석은 일제 시대 시인 윤동주와 조선 민주주의 항일 투쟁 시인으로 알려진 시인으로 그의 시 ‘나와 나타샤, 당나귀’는 그녀와의 사랑을 못 잊어 쓴 시였다한다. 시인 백석은 일본 유학 후 고향인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다. 백석의 시 ‘사슴’은 일제 하에 우리 글 쓰며 민족의 혼을 살리고자 민속적인 토속어로 독특한 모더니즘, 시인 김소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한다. 하룻밤의 잊을 수 없는 사랑을 시베리아에서 죽음앞에 선 ‘나타샤’처럼 못내 그리움을 나와 나, 사슴, 그의 소설속에 시인 백석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숨겨져 있다. 시인 백석은 1963년 북한 문단에서 자취를 감춘 뒤 숙청설과 사망 소식까지 떠돌았다. 최근에야 그가 1996년 85세로 생을 마쳤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 한많은 삶 속에 가슴에 숨겨 둔 사랑을 못내 못 잊어 지은 절이 ‘길상사’였다. “천억 원이 넘는 돈을 어떻게 내놓으셨어요” 묻자, “천억은 백석의 시 한수만 못해” 하며 웃으시는 한많은 한 여인의 사랑이 숨겨진 사연이 ‘길상사’로 지어진 것이다. 한 많은 여인들의 설움의 사연들이 숨겨진 청와대 뒷길에 숨은 절터는 뭇 여인들의 옷을 벗는 설움이 우는 그자리에 지어진 절 ‘길상사’ 언덕에는 ‘에밀레 종’ 이 세워져 밤을 울며 온누리에 한의 울음이 퍼진다. 남과 북, 민족의 한 서린 설움의 절벽은 ‘시인 백석’이 세상을 떠난 뒤 못내 그리움으로 백발이 된 한 여인의 눈물로 바쳐진 절, ‘길상사’는 못다한 여인의 사랑의 고백이었다.
흰 바람 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달디단 따끈한 감주
나 한잔 먹고 싶다는 생각고 생각하는
내 가지 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맨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 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굿국을 끊여 먹는다
이 흰 바람벽에 내 쓸쓸한 얼굴 쳐다보며--
나는 이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그렇게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내 가슴은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초승달과 바구지 꽃,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프란시스 잠,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시인 백석]
천재 시인 백석은 조선 민주주의 시인, 시인 윤동주와 항일 운동을 한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