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자(숙명여대 미주총회장)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인 윤동주]
“언니야 죽지 마.”
난 아직 너를 보낼수 없어. 두살 위인 우린 쌍둥이처럼 그리움도 미움도 함께 했었지.
기차도 볼 수 없는 첩첩산중에서 그저 밤하늘 별들을 바라보며 살았었지.
내가 초등학교 일학년때 시골 원두막에서 수박, 참외를 깨 먹으며 “언니야, 난 커서는 미국에 가서 살래” 하자 “야! 이 시골에서 태어나 어떻게 미국을 가니” “비행기 타면 가지”하더라며 웃었다.
내 언니의 마지막이란 부음 소식을 듣고 나는 괴로워했다. 유난히 미모의 그녀, 시골에서 그 많은 일들 속에서도 손이 미워진다고 빗자루도 들지 않았다. 그런 언니가 대학 시절 어느 날 “오늘 너에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 소개해 줄게.”
그날 언니의 좋아하는 그 사람을 만나고 언니의 일생이 왜 한눈에 보였을까.
알 수 없는 태풍이 불기 직전처럼 기쁨보다는 ‘듀노이의 비가’ 처럼 가슴이 소용돌이쳤다. 그녀의 선택인데 왜 내가 그토록 충격과 격정, 알 수 없는 직관이 소용돌이쳤나.
고통과 피나는 인내를 쏟아내야하는 ‘하늘 여는 빗소리’가 들렸다.
언니는 결혼 후 성남 판자촌에서 교회를 하면서 머리를 몽땅 걷어 올리고 남루한 작업복에 교회 사모로 살고 있을 때, 가끔 찾아가보면 판자 집에 철없는 삼남매는 방 하나에서 뒹굴며 살았다.
라면에 누룽지를 넣어 끓여서 먹으며 살았고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었고 남자들만 넷에 형편이 여의치 않아 옥수수 죽을 끓여 먹으며 가난한 판자촌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철없는 나는 “언니 괜찮아?” 묻는 나에게 “내영혼이 은혜 속에 사니까”하며 웃었다.
가끔 가서보면 울고 돌아왔던 그녀의 남다른 가난한 목회자 아내 모습--
그 뒤 난 남편의 직장 따라 고국을 떠났다. 어렵게 어린이집도 운영하며 살던 그녀가 미국행을 서둘러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시 작은 교회를 하고 있었다.
쉽지 않은 이민 목회,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었고 생활이 안 돼 일본 식당에서 밤일을 하고 있었다.
언니는 내가 고국에 돌아오지 않는 한이 쌓여 미국행을 했다고 했다.
목사님이 중풍으로 눕게 되었고 20년을 넘게 소대변을 받아내는 어려움까지 겪으며 살아왔다.
몇 년 전 목사님은 소천하셨고, 전 존재를 던져 살아온 하늘 열리는 빗소리가 언니의 얼마 남지않는 부음 소식에 단지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그녀의 고통과 아픔의 한 생이 왜 내게는 이렇게 좌절과 고통인지.
철없던 우리 그 소녀시절, 내가 선과 악을 종교를 넘어 고통의 마지막 생을 바라보는 내 가슴이 무너진다.
난 너를 아직 보낼 수 없어. 언니야! 한 여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전 존재를 내던져 살아 온 그녀, 전 존재를 바쳐서, 다 바쳐야하는 하늘의 부르심, 그 소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지 나는 아직 모른다.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 성당에서 죽음을 알리는 그 종소리도 난 아직 듣고 싶지 않다.
자신의 가난의 삶, 고뇌를 한번도 털어놓지 못하고 살아온 마지막 죽음 앞에 왜 난 분노를 느끼는지 모른다. 죽음은 그녀의 것 만은 아니란걸 나도 안다.
언니야
‘오늘은 나
내일은 너’
이별과 죽음 -
아직 철이 덜 든 탓일까
너와 나
그 어린 시절 원두막에서
미국가서 살자던 그 약속
왜 좀 더 기다려 주지 못했나
솔숲이 좋다던 우리집에서
그날의 소녀 시절로 돌아가
우리의 푸른 꿈은 가버렸지만
사랑으로 함께하지 못한
그 한의 세월 웃으며 웃으며
우리 소녀 시절 그 꿈을
꽃 피우려했는데
조금의 시간도 우릴 기다려 주지 않나봐
언니야 , 얼마 전 하고 싶은 일은 뭔데? 묻자
응 , LA는 홈리스가 많아--
계란을 하루에 몇백개 삼아서
그들에게
“주린배를 채워 주고 싶어” 하던 말
“맑고 선한 세상, 그미래는 우리 손에 달렸지” 하던 그 말
내게준 마지막 유언으로 내 가슴에 간직할께--
천국에 가서는 그토록 어려운 목사 아내는 안 할꺼지---
널 어떻게 내가 보내---
“사랑해, 사랑해 언니야”
난 그 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