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목하,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히스기야의 가장 무서운 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확증편향 Confirmation bias>입니다. 이것은 소위 “아전인수 심리현상”입니다. 나에게 이로운 것만 취하겠다는 이기주의적 발상입니다. 확증편향의 사고방식은 “나는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택하겠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지금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산헤드립의 침공으로부터 국가적 위기를 성전기도로 통하여 극복한 위대한 믿음의 영웅입니다. 바로 그에게 불어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는 <국가존망의 위기>가 아니라 <생사기로의 개인의 위기>입니다.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왕하 20:1) 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살려주옵소서!” 죽음의 선고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치유와 구원”의 기도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실수가 있다면 바로 확증편향의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함으로써 모든 관심이 타인에 대하여는 일체 불허하게 되는 <편중>과 <편향>으로 몰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오늘 자신의 사심을 일체 제거하겠다는 결단을 두 글자로 압축합니다. “진심과 전심”입니다. 진심과 전심은 히스기야의 면벽기도의 하이라이트입니다. “보이기 위한 기도”의 대명사는 바리새인의 외식적인 기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기 위한 기도”를 경멸하였습니다(눅 18:9~14). 히스기야의 면벽기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확증편향>의 모순점인 오직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앞에 행하여”(왕하20:2~3).
바리새인의 실존적 정체성은 오늘날도 현존하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이 바리새인의 허울좋은 외식을 송두리째 갱신한 기도의 영웅은 바로 <전심과 진심의 면벽기도자, 히스기야>입니다. <보여주기 위한 믿음의 행위>는 히스기야의 <진심과 전심의 면벽기도>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선한 마음으로 내 속에 있는 나를 통하여 이루는 믿음을 선한 진심으로, 악한 마음으로 내 속에 있는 나를 통하여 이루는 믿음을 악한 진심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진심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두 가지의 진심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심은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히스기야의 운명은 살아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는 백척간두의 벼랑 앞에 서 있습니다. “네가 죽고 살지 못한다(Mortal Being)”는 필연적인 죽음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것처럼,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99%가 아닌 100%의 마음으로 오직 벽을 향하여 시선을 고정시키고 “CORAMDEO”의 신전의식”으로 전력을 다하여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성자, E. M. Bounds는 이와같은 진심과 전심을 <간절함 (Eagerness)>이라 하였습니다. “죽을 만큼 간절하게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신다” 죽을 만큼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자의 중심은 바로 히스기야가 말한 그 <진심과 전심의 면벽기도>입니다. 지금 이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트라우마에서 전세계를 구할 수 있는 기도는 <보여주기 위한 바리새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죽을 만큼 간절하게 진심과 전심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드리는 히스기야의 면벽기도>입니다. 부동심(不動心)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응답되는 바로 그 순간은 <간절함의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용기있는 선포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리라”(왕하 20:5) 전심과 진심의 면벽기도는 죽을 힘을 다하여 드리는 간절함의 결정체입니다. 기도가 응답되는 바로 그 순간, <간절함>이 <거듭남>이 되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