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십자가에서 다시 만난 예수”는 초대교회의 큰 획을 그은 위대한 <사도 베드로의 인생드라마>입니다. 베드로는 문학가도, 철학자도, 과학자도, 예술가도, 지성인도 아닌 갈릴리 바다의 어부였습니다. 문학적인 시도나 철학자의 자세나, 과학적인 연구나, 예술가의 섬광같은 견지나, 지성적인 접근은 아예 단 한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순수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다, 그가 신앙의 딜레마와 죽음의 트라우마에 빠지고 난 후, 비로소 “거듭남”을 체험하고 다시금 예수님께로 다가서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가 다시 보게 된 예수 그리스도는 화려함이나 포장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신앙의 딜레마와 죽음과 환멸의 트라우마를 겪게 된 현장, 바로 그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났습니다. 사람은 만남의 연속 드라마 같은 인생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사야는 베드로가 십자가에서 다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700년 전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멋진 구도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비참한 모습으로 이 세상의 구주가 되실 것을 미리 예언하여 <장엄한 인생의 대 서사시>를 그렸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6). 이사야가 그린 예수는 바로 그 중심틀이 십자가입니다. 현대인들은 <멋>으로 치장하여 악세사리로 달고 다니는 그런 외식의 차원이 아니라 “찔림(Being Pierced)”, “상함(Being Crushed)”, “징계받음(Being Punished)”, “채찍에 맞음(Being Wounded)”의 대구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였습니다. 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계시는 십자가의 예수님과 그 현실을 모면하고자 현실도피를 추구하고 있는 베드로가 1:1로 만나게 된 현장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인생 드라마에는 반드시 역전(Paradox)이 있습니다. 희극의 인생이 있으면 비극의 인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인생의 역전(Paradox)을 몸으로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역전은 버리는 자에게 일어납니다>. 베드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베드로는 과거를 버리고 현실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역전은 바라보는 자에게 일어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죽음으로 대속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봄으로써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지금 주어진 현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자에게는 반드시 인생의 역전(Paradox)은 일어난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역전은 생각하는 자에게 일어납니다>. 베드로는 죽음과 환멸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다시금 평화를 회복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다시 만난 예수입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팬데믹 트라우마를 벗어날 수 있는 “인생의 역전(Paradox of Life)”이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십자가는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역전 드라마입니다. 그 십가가의 예수를 다시 만난 베드로처럼 우리도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인생의 역전은 “찔림”과 “상함”과 “징계”와 “채찍”에 맞아 상처와 피로 얼룩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날 때, 비로소 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