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Self Esteem)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 빚어지는 정당한 자기 평가의 결과입니다. 오늘 본서의 저자인 솔로몬은 궁중의 수많은 궁녀들 가운데 유독, 한 평범한 궁녀인 <술람미 여인>을 선택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을 상징적인 단어로 “사론의 수선화 혹은 사론의 장미” 그리고, “가시밭의 백합화”에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대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더욱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자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백성, 즉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된 교회, 신랑이신 예수님과 신부된 성도의 관계로 구도를 그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할 존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초점은 하나님을 높이되 만왕의 왕, 만유의 주재로 신뢰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되 신부된 교회의 참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의지하며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꿋꿋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참 성도의 고백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도의 자화상(Self Esteem of Christian)”입니다.
사론의 수선화는 사론의 장미로서 왕궁의 입구 앞에 놓여있는 화병에 쓰임 받는 꽃 중의 꽃입니다. 가시밭의 백합화 역시 동일한 목적과 선택의 대상입니다. 어찌 한낱 왕궁의 궁녀에 불과한 존재를 솔로몬은 이렇게 격찬의 대상으로 삼았을까요? 이것이 이 시대의 성도가 가져야 할 자아의식 혹은 자화상의 신념입니다. 솔로몬은 부귀영화를 당대에 그리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후 세대를 통틀어서 최고의 축복을 받은 왕입니다. 그의 입에서 평가된 “샤론의 수선화, 샤론의 꽃, 샤론의 장미”는 최고의 꽂입니다. 그가 평가하는 “가시밭의 백합화”는 가장 존귀한 모습의 품위와 위격을 갖춘 아름다운 꽃입니다. 품위와 위격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각을 황홀하게 하는 그 꽃향기는 각각 독특하면서도 가히 이 꽃에 견줄만한 향기로운 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술람미 여인이 최고의 신부를 상징한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시대가 혼탁합니다. 시대가 어지럽습니다. 자신의 중심을 분명히 해야 할 <중요한 때>입니다. 성도가 흘리는 말 한 마디, 성도가 행하는 사소한 행동, 그리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샤론의 장미, 가시밭의 백합화>가 보여주는 구체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아가서는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오직 예수”중심의 삶으로 일관하는 성도들이 날마다 묵상하며, 예수님의 향기를, 예수님의 자태를 나타내기 위해 가슴 속에 품어야 할 존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을 자인가?> 하는 것이 말씀의 초점입니다. 이 아가서와 대비되는 성서 66권 가운데 가장 접점의 말씀을 들자면 그것은 열왕기하 2장의 말씀입니다. 열왕기하 2장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헤어지는 명장면>이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 말씀 중에 주목되는 말씀이 있다면 열왕기하 2장 9절입니다. 불수레 불병거를 타고 살아서 천국으로 입성하는 엘리야를 향하여 외친 엘리사의 소원이 기록된 말씀입니다. “당신의 성령이 하는 역사가 갑절이나 네게 있게 하소서!” 즉 갑절의 영감을 달라고 외친 것입니다. 왜 이 열왕기하의 말씀이 아가서 2장과 결부되는 말씀일까요? 성도는 자신의 감정이나 감성에 의존하는 세상사람들과 절대적으로 비교되는 존귀한 자입니다. “사론의 수선화, 골짜기의 백합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아름다운 꽃 수선화, 그윽한 향기의 백합화 주변에는 당연히 같은 부류의 아름다운 꽃들로 즐비할 것만 같은데 정반대로 아가서의 저자는 당연히 좋은 환경이 있을법한 상상을 배제하고 전혀 다른 악조건의 환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골짜기가 있는 암벽에서 과연 수선화, 백합화가 필까요?” “가시덤불이 우거진 가시밭에서 무슨 백합화가 필까요?” 그러나, 아가서 2장 1절~2절에 “내 사랑, 사론의 수선화, 골짜기의 백합화”를 예수님은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열악한 시대의 예수향기는 당연히 성도여야 합니다. 참 크리스천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