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지상의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국가최고의 권력자인 <왕>일 것입니다. 왕, 대통령, 수상은 국가최고 권력자를 두고 그 체제에 따라 부르는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성군을 들자면 당연히 다윗왕입니다. 다윗은 당대에 부와 권세를 다 움켜잡은 최고국가원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다윗은 시편 40편에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외칩니다. 자신을 향하여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가난과 궁핍”을 외치게 하였을까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윗의 입장에 선다면, 당대에 그를 능가할 전쟁의 영웅은 없습니다. 밟는 곳마다 다 정복하였고, 싸우는 상대마다 다 무찔러 연전연승으로 <승리의 개가>를 하나님께 영광돌린 실전의 최고사령관입니다. 그리고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낸 <구국의 영웅>입니다. 그러나, 시편 40편에서 “야훼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야훼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는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는 다 물러가 욕을 당하게 하소서. 나를 향하여 하하 하하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시 40:13~15) 이 삶의 절실한 고백을 어떻게 당대의 최고국가원수이며 전쟁의 최고전문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다윗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말일까요? 이렇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범부들의 관점>입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경박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엇이 현실에서 ‘가난과 궁핍’의 상황일까요?> 예수님은 가난과 궁핍을 영혼의 상태를 두고 표현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들의 것임이요”(마5:3). 지금 다윗은 예수님의 적절한 표현으로 바라본다면 그는 “마음”이 가난하고 궁핍한 것입니다. <마음의 가난과 궁핍>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영혼의 메마름과 깊은 고독감에 빠진 자만이 감지할 수 있는 <예리한 영적 통찰력>입니다. 나는 오늘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까? 나는 오늘 진정으로 마음이 궁핍한 자입니까? 불현듯,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자는 <마음의 가난과 궁핍>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낄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입니다. 다윗의 심정은 이와같은 “상실감”으로 인한 “가난과 궁핍”이 아니라, 지금 현실에서 “진정으로 나와 함께 하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음에 절감하는 <심리적 괴리현상>인 것입니다. 목적과 일을 성취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다 나의 친구와 조력자가 될 줄로 알지만, 지금 다윗의 심정은 목적과 일을 다 성취하였음에도 <단 한 사람의 참 친구>가 없음에 마음이 “가난”하고 “궁핍”한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시40:17) 내 인생의 가장 극심한 위기 앞에서, 내 인생의 가장 참혹한 상황의 면전에서 나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정직함>만이 우리의 <감겨진 영혼의 눈>을 뜨게 하여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 위대한 믿음의 경지에 도달하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