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작가 페르 라게르크비스트(Par Lagerkvist)의 소설 “바라바”는 195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영화화된 작품이다.
한국에는 한국 전쟁으로 인해 늦게 1963년에 선우휘 작가에 의하여 최초로 번역되었다.
“바라바”는 신약 성경 속의 실존 인물이며 예수님 십자가 처형 때 사면받아 처형을 모면했던 흉악한 도적인 사형수였다. 그가 석방된 후 기록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라게르크비스트의 상상력에 의하여 캐릭터가 부여된 그의 인생의 여정이 독자들 앞에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바라바는 신앙을 갖고자 하지만, 신앙의 회의에 빠져 신앙을 가질 수 없는 현대인처럼 연약한 신앙의 여정을 걸어간 비극적인 일생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골고다 현장에서 지켜보았던 바라바는 자신의 구원이 십자가 사건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주님의 절규가 끝나는 순간 바라바는 그 뜻을 알 수 없었지만, 대낮인데 처형장 언덕에 잠시 드리워졌던 칠흑 같은 어두움을 계속 생각하게 된다. 왜 나사렛의 예수가 자기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했는지 알 수가 없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라바는 가끔 골고다 사건을 생각하며 구원의 의미를 되새기기 시작했다. 산적으로서 용맹과 공격 성향도 사라졌다. 말수가 더 적어지고 무슨 생각에 골몰하는 인상을 동료들에게 주기에 충분했다. 지난날의 활동적이었던 바라바가 아니었다. 산적 패거리는 그가 감옥에 오래 있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뻔했었기에 이상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리라 기대했으나 실망하게 된다. 그의 심리적 변화를 이해했던 동료들은 그의 달라진 모습에서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제는 그의 존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어느 날 바라바는 스스로 홀연히 그곳을 떠난다. 바라바가 산적의 굴을 떠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다시 로마에 의해 체포되어 키프로스 섬의 지하광산 갱도에서 수년간 험난한 삶을 살게 된다.
이때 만난 단짝은 아메리아 사람인 “사하크”는 크리스천이다.
사하크는 예수의 십자가 고난의 현장을 지켜보았고 부활을 목격한 바라바(앤서니 퀸)를 통해 신앙심이 더 깊어지며 기쁨을 누리게 된다. 사하크(빅토리오 오커스먼)는 증인 바라바와 생사를 같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한없는 축복으로 여긴다. 사하크의 신앙심에 감동한 노예 감독에 의해 사하크는 지상의 세계의 노예로 옮기게 된다. 기적의 순간에 사하크의 요청으로 바라바도 함께 지하광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하크와 바라바는 지상에서 공동 운명체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감사의 기쁨을 누린다. 사하크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지만 바라바는 무릎 꿇고 기도하지 못했다. 사하크는 바라바와 함께 기도하길 원했으나 바라바를 책망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바라바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하크는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지상 세계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게 했음이 감사하고 행복했으나 믿음이 자라지 못한 바라바는 눈앞에 전개되는 세상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바라바에게는 기적의 은총이 삶으로 나타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삶의 관점과 신앙관은 달랐으나 서로 사랑했다.
어느 날 아침, 바라바와 사하크는 감독과 함께 총독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된다. 자신의 신을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는 총독의 설득에도 사하크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순교자가 되었다. 바라바는 자신은 신이 없다고 부인해 살아남는다. 바라바는 사하크의 무덤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에 대성통곡을 한다.
바라바의 회의적인 신앙의 여정처럼 우리가 지향하는 신앙의 모습은 닮아있지 않는가. 키프로스 섬의 총독은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왔다. 바라바도 개인 노예로 함께 왔다. 바라바는 지하묘지인 카타콤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지상에 올라온 순간, 로마시에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 방화를 한다.
주님이 오셨다. 추악한 로마를 불로 심판하기 위해 그분이 오셨다. 이번에는 그분을 배반하지 않겠다. 바라바는 불을 옮기기 위해 계속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바라바는 방화범으로 체포되어 베드로와 크리스천과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된다. 건장했던 그는 늦게까지 십자가상에서 홀로 남아 그렇게 두려워하던 죽음이 닥쳐옴을 느끼자 어둠을 향해 말했다. “당신께 내 영혼을 드립니다.”우리가 마지막 순간에 할 수 있는 내면의 호소이기도 하다. 그의 신앙의 여정은 물리적 어두움보다는 신앙의 회의에서 오는 어두움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