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5월 우리 가족은 애틀란타에서 이민 생활을 시작하였다. 미국 이민 비자를 받은 후 낯선 타향에서 산다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정든 고향을 떠나는 것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 차일 피일 미루다 애틀란타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의 홀어머님은 우리가 먼저 이민 생활을 시작한 1년간 홀로 한국에 계시다가 그 이듬해에 들어오셔서 가족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 당시 애틀란타는 교민 수가 몇 천명 정도였고, 대부분은 생업에 매여 있어서 평일에는 거의 만날 수 없는 환경이었다.
한인 천주교회도 일요일 하루만 미국 성당을 빌려서 주일 미사를 드리는 형편이었다. 주일 미사 후 친교 시간이 교인들과 만나서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어머님은 한국에서처럼 매일 새벽미사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 제일 아쉽다고 늘 말씀하시곤 하셨다.
처음 이곳에서 시작한 회사는 2년 후 뉴저지로 이전하게 되어, 미국 식품점을 인수하여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평생 해본 적 없는 장사에다, 언어와 생활 풍습이 다른 남부 미국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집 안에 혼자 계시면 답답하다고 일주일에 두어 번 가게로 같이 나와 야채도 다듬고 청소도 거들어 주시며 흑인 종업원들과 손짓 발짓으로 의사 소통도 하시며 오직 주일 미사 시간 기다리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으셨다.
그러던 중 1997년 3월에 뇌졸증으로 쓰러져 반신을 못 쓰고 말도 못하게 되었다. 3년 넘게 한의와 양의 치료를 받으셨지만 결국 2000년 5월에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해방 후, 이북에서 월남하신 어머니는 언젠가 남북 통일이 되면 평남 진남포 우체국 뒷산에 묻고 온 아버님 산소를 찾아 보는 것이 소원이라 했는데 한국도 아닌 이 낯선 미국 땅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으신 것이다. 그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
어머니의 장례 미사를 치르고 며칠 뒤에 어머니 방을 정리하던 아내가 어머니의 버선 한 쪽을 들고 급히 나를 불렀다.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 것 같다고. 버선 속에는 현금 천이백 불이 차곡차곡 단정히 접혀 들어 있었다. 그간 드린 용돈을 모아 놓은 것 같았다.
아내와 나는 그 버선을 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 천이백 불은 애틀란타 한국 순교자 천주교회 건축 헌금으로 봉헌되었다.
어머니의 10주기가 될 무렵, 아들 현기의 혼배 미사를 10년 전 할머니의 버선 속 건축헌금으로 벽돌 한 장을 쌓았던 바로 그 성당에서 올리었다.
올해는 벌써 어머니의 21주기가 된다. 그리운 어머니.
마음에
봄을 담겠다고
가슴을 열었더니
어머니 생각이 달려 옵니다.
아쉬움이 많고
그리움이 너무 많아
봄을 담을
내 가슴에
비어있는 자리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