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 그 행동이나 말이 매우 거슬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런 이야기들을 자주 하게 됩니다. “저게 무슨 신자라고.” 우리가 그렇게 말하고 싶은 성경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를 비판할 때 언제나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그 인생에 있어서 이 시점, 이 자리에 오기까지 하나님이 계속 이 사람을 만들어 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많은 거리를 하나님이 지정하신 그 삶의 성숙의 자리에 오기까지 계속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아직도 야곱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대하시는 사람이 되고저 만들어지는 과정 가운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이 과정 가운데 있는 이 사람 야곱에게 우리가 완성된 수준에서 이 사람의 삶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지나친 무리이거나 때로는 속단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대학교 수준의 태도나 지식을 요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에 내 눈에는 들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형제나 내 자매의 눈 속에 있는 그 티끌을 용납하지 못하고 우리의 이웃을 정죄하려는 그 비판과 또 남을 비판하는 이런 파괴적인 유혹을 종종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야곱의 생애를 정직하게 추적하면서 성경에서 야곱을 대할 때마다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야곱 할아버지여. 당신은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런 심정을 가져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묘사할 때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묘사된 이 세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야곱. 그는 가는 곳 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모든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의 상황에서 이런 신앙의 환경과 이런 신앙의 조건 속에서. 이런 신앙의 기대를 받고 있는 야곱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일생이 보여주고 있는 삶의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사기치고. 거짓말하고. 잔꾀를 부리고. 수작을 하고. 가는 곳 마다 문제를 만들고. 도피 행각을 계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도 너무하다고 느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야곱의 삶 속에 도전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말합니다. “야곱. 너 이제는 손 좀 봐야겠어.” 이래서 전개되는 것이 (창세기 32장) 입니다.
우리도 자식을 키우다 보면 종종 이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도저히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을 때 사랑으로 채찍을 들게 됩니다. 이제는 좀 달라져야지 되지 않겠니…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나 우리가 자식을 향하는 마음은 똑같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지만 그래도 깨닫지 못하자 하나님은 이제 야곱의 삶 속의 변화를 강력하게 축구하시면서 선언하기 위하여 얍복강 나루터의 교육의 현장으로 야곱을 불러 내시는 장면이 성경에는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야곱은 이민 생활을 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우리의 이민 초창기에도 그랬습니다. 조국을 떠나서 이곳 이민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 고생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겠지요? 야곱도 그랬습니다. 자기의 외삼촌이요 장인이었던 라반의 집에서 땡전 한푼 받지 못하고 20년을 고생했습니다. 그는 고향 생각에 늘 젖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민 20년을 청산하고 이제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오르기를 결심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히 나이가 든 어르신들에게는 고향이라는 것이 마음속에 묻혀 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특히 우리 이민자들에게 “이 고향”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안 흘릴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야곱도 그랬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