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의지하여”. 이것은 <은혜의 깊은 강가>로 들어가는 첫 관문입니다. “생각”에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되면 <관념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감정”에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되면, <감상주의자>로 몰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분”에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되면 기분의 굴곡에 따라 움직이는 <기회주의자>로 빠질 우려가 높습니다. 본문의 상황에 있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 예수님의 말씀에는 <은혜의 진취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깊은 강가로 나아가는 자>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너무나 명확하게 말씀하여 줍니다. 은혜의 깊은 강가로 나아가는 자의 정반대는 깊이가 없이 늘 얕은 물가에만 머물러 있는 <은혜의 피상성>에 빠져 있습니다. <은혜의 피상성(Superficiality of Grace)>에서 벗어나오지 못하는 자들의 가장 뚜렷한 증거는 언제나 자기 생각에 빠져 사는 <광적인 관념주의자>, 감정에 사로잡혀 사는 편집증(Paranoia)에 빠진 <감상주의자>,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는 <열렬한 기회주의자>에서 벗어나오지 못하여 늘 <삶의 오류>를 거듭거듭하며 살아갑니다.
베드로의 혁신적인 삶은 과감하게 자신의 <인>에서,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오는 과감한 “용기”가 있습니다. 자신이 터득한 노하우<No How>에서 벗어나오는 탁월한 “겸손”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삶의 갱신은 무엇보다도 주변의 사람들에게 매혹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일향성(一向性)>이 관건입니다. 무엇이 주변의 동료들, 즉 다른 제자들과 구별되어진 베드로만의 특징일까요? 그것을 발견해야 오늘 우리가 빠져있는 <은혜의 피상성(Superficiality of Grace)>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이룬 업적에도 휘둘리지 않는 <은혜의 탁월성(Excellence of Grace)>이 있습니다. 자신의 공로와 업적에 흥분하면서 그로 인하여 몰락하는 <은혜의 위기(Crisis of Grace)>를 베드로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 5:6). 우리가 원하는 <은혜의 충만함>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은혜의 깊은 강가”입니다. 은혜의 탁월성은 바로 은혜의 충만함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은혜의 피상성에서 벗어나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탁월함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는 <은혜의 깊은 강가>가 그에게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불행이 닥쳐도 그 불행을 은혜로 바꿀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실패와 고난”이라는 <불행>이 찾아오면 그 무게감에 눌려서 좌절하고 낙심하는 것이 과반사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외였습니다. 그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에게 주님께서 다가가신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과 똑같은 처지에 있었지만, <은혜의 피상성>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은혜의 깊은 강가>로 나아갈 수 있었던 베드로의 탁월성은 베드로의 자세에 있습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밤을 새워 철야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도로(徒勞)>에 불과했음을 과감하게 인정할 줄 아는 이 <정직함>이 베드로의 탁월함의 근거입니다. 수고하여서 얻은 결과가 “순 제로(Net Zero)”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서든 비참한 것입니다. 이 참담함에서 벗어나오려면 자세를 전환할 줄 아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생각”에서, “감정”에서, “기분”에서 <말씀으로 전환하는 실천>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여전히 “은혜의 피상성”에서 행방을 찾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면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지도자의 무능함, 사회의 괴리적 모순, 경제의 불확실성, 기후의 기현상” 등등의 변명과 핑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원인은 “은혜의 깊은 강가”로 나아가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