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화적인 흐름과 유대인들의 문화적 흐름이 상당히 닮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 하나는 인사입니다. 유대인들은 만날 때 마다 “샬롬”이라는 인사를 주고 받습니다. 이것은 옛날 예수님의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그들의 인사법입니다.
“샬롬” 이 말의 뜻은 “평안하십니까” 입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의 인사법과 얼마나 방불한지요? “안녕하십니까?” “평안 하십니까” 이것은 유대민족이나 한민족이나 둘다 안녕하지 못한 민족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주는 사건일지도 모릅니다.
흔히 우리 민족을 자랑할 때 이런 명칭을 많이 사용합니다. ‘백의 민족,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 그러나 이 말은 어쩌면 역사적으로 평안하지 못했던 우리들의 열등감을 보상받기 위해서 우리가 붙여 준 하나의 별명일지도 모릅니다.
더 솔직한 설명은 우리는 결코 우리의 힘으로 평안을 보장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 평화를 기다리고 소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평안을 그렇게 애타게 갈망함에도 불구하고 평안할 수 없었고 그래서 만날 때마다 이 슬픈 인사를 오늘도 주고 받습니다. “안녕 하셨어요, 평안하셨습니까?” 이 평안에 대한 성경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기독교 신앙은 평화를 갈망하는 인간의 물음에 대답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빌립보서 4장)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강, 평화’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신 이 평화, 평강은 도대체 어떤 평화이며 평강입니까? 성경은 이 평강과 평화를 말할 때 환란이 면제된 평강, 평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염려 거리와 걱정과 불안과 파도와 폭풍우와 비바람과 어둠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면제하거나 이것을 꼭 내 곁에서 멀어지게 함으로써 평안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평안은 환란과 파도의 한복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그런 평안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기상이 나쁜 날 비행기를 타보셨나요? 구름이 끼인 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비행기를 타 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비행기가 흔들리고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비행장을 떠날 때 비행기를 탑승한 모든 승객들의 마음은 대단히 우울하고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비바람치고 안개낀 날 마침내 이 비행기가 높이 상승하여 구름 위를 향해서 올랐을 때 구름 아래에서 볼 수 없었던 다른 세상의 하늘과 우주를 보게 됩니다.
맑고 화창하기 그지없는 깨끗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새로운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평안은 이런 유형의 평안입니다. 비바람과 구름을 뚫고 더 높이 올라간 후의 잔잔하고 맑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 교훈을 하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다락방에 모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의 강론을 가리켜서 ‘다락방 강화’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최후로 제자들의 곁을 떠나시면서 무엇을 남기셨습니까? 예수님이 남기기 원하셨던 많은 것 가운데 바로 평안 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
성경은 이 다락방 강화의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2) 주님께서는 환란이 없는 평안이 아니라 환란 후의 평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사태 이후 평안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사태 이후 다시 찾아 올 평안을 기대하면서 오늘도 열심히 살아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