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처음 신학을 공부할 때의 설교학 시간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설교를 한 편 씩 하고 설교학 교수인 목사님께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설교에 대한 평가를 하는 그런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학생으로서 설교를 배우는 입장에서 그 날 참 인상깊은 첫 번째 설교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저는 “고독하신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에 그 설교에 대한 평가를 하는 시간에 교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설교에 대한 태도나 자세나 모든 것이 다 잘되었는데 그 설교의 내용이 대단히 비성경적이다. 예수님은 결코 고독하지 않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 전부터 교제를 나누셨다.” 이런 충고의 말씀을 제게 해주셨습니다.
그로부터 이제 35년이 지난 지금은 목회를 할만큼 했고 또 신학을 할만큼 했고 설교를 할만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그날 제가 처음했던 그 설교에 대해서 그 제목과 내용에 대해서 취소할 용의가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은 참으로 고독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고독에 대해서 부정적인 접근을 하게 되는 원인 중에 하나는 고독을 죄의 결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독에 대한 신학논문을 읽어 보면 일반적으로 고독을 타락 이후의 사건이나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물론 타락이 인간의 고통을 저질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다 깊이 성경을 살펴보면 고독은 타락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저는 차라리 고독을 인간 존재의 양식이요 창조의 한 양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생각나십니까? 주께서 아담을 지어 놓으신 다음에 아담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 이 지음받은 인간에게서 고독을 보신 것입니다. 인간은 고독하도록 이 고독을 통해서 사랑을 추구하게 되고 이 고독을 통해서 의미있는 만남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러므로 아담은 하와를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게되며 마침내 아담은 하와와 더불어 인간 존재에 대한 위대한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 생명의 근원되시는 창조주 하나님 없이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고독이 단순히 고통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관점에 따라서 고독은 차라리 하나님의 선물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이 그런 것처럼 예수님의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도 예수를 따라가기만 하면 큰 복을 받고 사업이 잘 되고 출세하고, 또 교회의 직분을 따게 되면 사회적으로도 신분이 높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박해의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절대로 불리한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오히려 곤란이 찾아오고, 박해가 찾아오고 고통과 어려움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고통과 박해를 받기 시작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한 사람씩 스승의 곁을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본 예수님은 “너희들도 가려느냐”라고 슬픈 어조로 말하는 것을 요한복음 6장에서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보라 너희들은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 혼자 있지만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은 모든 고독을 대결하고 직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첫 번째 교훈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변 모든 사람들이 내 곁을 다 떠나도 나는 고독하지 않는 것은 내 곁에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고독하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