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시인 김춘수의 “꽃”의 시에서 시인이 노래에서 봄꽃 향기가 그윽하게 피어오르는 봄에 꽃처럼 피어나는 기쁨이 있다면 그는 바로 헵시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쁨의 주님이시고, 주님 안에 그 기쁨이 언제나 꽃처럼 피어나는 봄꽃 예수가 로마서 2장에서 내면의 믿음을 영혼의 진정성을 구원의 핵심으로 말씀합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만이 줄 수 있는 기쁨, 그것은 헵시바입니다. 헵시바의 축복은 그 역사적 배경이 참회의 눈물로 수명 연장을 받은 히스기야 왕의 왕비에게 “내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기쁨, 언약적 귀결의 계시를 배경으로 합니다(왕하 21:1). 이 헵시바의 축복과 로마서 2장과 상호연관성은 로마교회가 존재하던 1세기의 유대인들이 생래적 유대인, 표면적 유대인의 외모에 지나치게 치우침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일침을 가하고 있음에 있습니다. 로마서 2장 5절,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는 말씀과 구약성경의 통전적 계시의 말씀으로 예언과 성취를 이루고 있습니다(시편 62편 12절,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잠언 24장 12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로마교회를 향한 바울의 서신은 하나님의 심판에 역점을 두고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참회의 귀결, 헵시바의 귀결”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순절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진심으로 동참하고 온전히 참회의 열매를 맺어 성도의 성화, 성도의 중생에 그 목표를 두고 있으므로,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통렬하게 채찍질하는 경고의 메시지는 21세기의 코로나바이러스 역병의 영향권에서 여전히 고통을 당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즈미언들에게 그 어떤 변명이나 이유를 불문하고 표면적 유대인, 표면적 크리스천이 아니라, 내면적 유대인, 내면적 크리스천의 중심으로 거듭나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헵시바의 귀결(歸結)은 코비드-19의 역병의 장기화로 인하여 <잃어버린 기쁨과 소망>을 회복하고 그 결과, 이 땅에서 간직하고 있는 참소망이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천국시민이 누릴 영원한 기쁨을 날마다 새롭게 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서,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참기쁨과 참소망의 언약적 계시는 헵시바의 귀결의 최정점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소망이 끝나지 않고 영원한 천국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게 함으로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는 약속의 축복이 마침내 완전한 성취로 그 결과의 열매를 맺습니다.
헵시바의 귀결(歸結)은 그 어떠한 악조건의 고난이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온다 하여도,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선포하시며, 스스로 참소망의 헵시바로 계시하신 <사순절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소망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헵시바(Hephzibah)>이시기 때문입니다. 참기쁨의 원천은 이 땅에 오셔서 두 가지의 책임(Accountability), 즉 <십자가와 부활>을 친히 감당하시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면한 현재의 십자가의 고난, 당면한 예측불허의 돌발상황(Sits Im Leben) 가운데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니다(히브리서 12:2). 이 기쁨은 이제 봄꽃 예수의 영원한 복음입니다. 그것은 “헵시바(Hephzipah)”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