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풍자적인 기독교 작가는 어린이를 위한 이런 인상깊은 이야기를 썼습니다. ‘참새와 물새의 대화’입니다.
어느 날 물새가 참새에게 이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참새야, 저 아래 지구 위에서 허덕거리며 걸어 다니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봐. 저 아우성 치며 허우적거리면서 살고 있는 인간들의 꼴을 보란 말이야.”
그 옆에 있던 참새가 이야기합니다. “물새야. 아마 쟤들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모양이지.”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공중의 나는 새를 자세히 관찰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얼마나 먹이 찾기에 열중을 하고 있습니까? 땀을 흘려 일하고 있습니다. 들의 백합화를 보십시오. 뿌리를 땅 속에 박고 영양분을 흡수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그 백합화의 몸부림과 생존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책임지시므로 그들은 생존의 문제를 이 땅에서 해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과 같은 의식이 전혀 없는 식물에 존재의 이유가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들의 생존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과 같은 차원에서 그 생존의 의미를 생각할 수 없는 백합의 생존이, 공중을 날고 있는 새들의 생존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믿는 다면 나의 인간됨에 대한 생존의 이유가 하나님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들의 백합화를 돌보시고, 공중에 나는 새들을 돌보시는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지시고, 내 삶을 인도하시고,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내 삶의 목적을 부여하시고, 그 목표를 향해서 가도록 섭리하시는 것을 당신은 왜 신뢰하지 못하시나요?
한 성경학자는 이러한 재미있는 관찰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나는 독수리를 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공중에 나는 새들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독수리는 그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존의 힘이 새들보다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의 먹이로 삼기에 능력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주께서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새는 아주 작은 새를 뜻하고 있습니다. 피라미새, 그런 새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지만, 이런 가장 작은 새를 말합니다.
이런 작은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작은 새 한 마리까지 돌보시는 하나님, 만물 가운데 가장 시시한 미물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그 생존의 의미를 부여하시고, 그 생존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예수를 믿어 새 생명이 마음 속에 꿈틀거리고 영생의 소망을 갖고 살고 있는 나와 여러분들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지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얼마만큼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신앙인답게 살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답변을 줄 수 있는 시험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염려거리가 찾아올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십니까? 그 순간이 내 신앙의 진면목을 과시하는 순간입니다. 불신자처럼 여전히 염려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과 그리고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서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입니까? 염려는 비생산적일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비신앙적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6장31절을 한번 살펴볼까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여기에서 염려는 다 이방인의 삶의 방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 예수 없이, 영생의 소망 없이, 내일에 대한 소망 없이 오늘에 몰두하고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