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상대가 있는 싸움이다. 자기 혼자서 하는 경기가 아니다. 혼자 하는 경기라면 자기에게만 집중하면 되지만 상대가 있는 싸움은 전략적 유연성을 요구한다. 겨루기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실감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상대에 따라 내 플레이의 수준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수준 높은 상대를 만나면 어렵기는 해도 내 플레이까지 덩달아 괜찮아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반면 상대가 형편없으면 내 플레이 또한 엉망이 되기 일쑤이다.
권투를 예로 들어 보자. 상대가 일정 거리에서 서로 펀치를 주고받으려하기 보다 툭하면 붙잡고 넘어지려고만 한다면 정상적인 경기가 힘들어진다. 기량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한 채 서로 엉겨만 있다가 경기가 끝날 수 있다. 비록 적이기는 하지만 수준 있는 대결을 펼치려면 서로 괜찮은 파트너가 돼야 한다. 파트너가 자꾸 내 발을 밟아대면 내 스텝도 꼬여버린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9월29일 열린 첫 번째 후보 토론회가 바로 그랬다. 토론회의 가장 중요한 취지인 정책설명은 실종된 채 시종 감정적인 말싸움과 개인적인 비난으로 일관됐다. 토론회가 이런 분위기로 흘러간 데는 트럼프의 노골적인 끼어들기와 상대 말 자르기가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사회자의 제지도 통하지 않았다. 보수성향의 폭스뉴스 조차 “트럼프 대통령이 사회자 크리스 월러스와 바이든 후보를 ‘백악관 기자’처럼 짓밟았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토론태도를 문제 삼았다. 트럼프의 마구잡이 전략에 발언 기회를 빼앗기던 바이든은 토론 중반 이후부터는 트럼프가 노골적으로 끼어들었을 때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가는 식으로 대응했다. 그러면서 토론회는 한층 더 이전투구 양상으로 흘러갔다.
CNN은 “난장판이었다”고 토론회를 평가하면서 “트럼프는 처음부터 토론회 물을 진흙탕으로 만드는 게 목표였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상대가 진흙탕을 만들어 놓으면 나 또한 진흙을 묻히지 않을 도리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허위 주장을 제기하면서도 정책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피했다”(뉴욕타임스) “트럼프 대통령은 토론회를 서커스로 바꾸려 했다”(LA타임스)는 등 다른 언론들의 평가도 비슷하다.
언론들은 누가 토론회의 승자인지 가늠하기는 힘들어도 유권자들이 패자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꼬집었다. 과연 29일 토론회 같은 난장판 이벤트를 통해 유권자들이 판단에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는 얘기다.
언론의 이런 부정적 평가 속에서도 토론회 직후 실시된 즉석 여론조사에서는 바이든이 더 잘했다는 응답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누가 이겼다고 생각하는가라는 CNN 조사에서 60%가 바이든, 28%는 트럼프를 꼽았다. CBS 조사에서도 바이든 47%, 트럼프 40%였다.
이런 조사결과에는 트럼프가 토론회 전 한껏 낮춰 놓은 바이든에 대한 기대치가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2018년부터 바이든을 ‘슬리피 조’라고 조롱하며 대통령 직을 수행할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상태가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심지어 수행능력 향상을 위한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했다. 일과성 발언이 아니라 아예 이것을 캠페인 전략으로 삼았다. 이에 대해 공화당 전략가들조차 “자칫 잘못하면 바이든에게 의도치 않은 선물을 안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29일 토론회 후 나온 유권자들 반응은 이런 우려가 현실화 된 결과로 보인다. 토론회 전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7%가 트럼프 대통령이 토론에서 이길 것으로 예상했다. 바이든 후보가 이길 것으로 본 응답자는 41%였다. 이런 낮은 기대치가 토론회 후 오히려 바이든에 대한 호의적 평가로 이어진 측면이 있다.
누가 이기고 졌는지를 떠나 29일 대선 토론회가 기대에 훨씬 못 미쳤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아무쪼록 앞으로 남은 두 번의 토론회는 서로 뒤엉긴 채 나뒹구는 이전투구가 아니라 날카로운 펀치를 주고받으며 유권자들에게 실력을 검증 받는 클린 파이트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