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 권명오
수필가·칼럼니스트.
Ⅰ한국 38년(44)
예술대학 연극 영화과
윤복현 교감 선생님에게 실력도 계획도 목적도 없이 그럴듯 하게 법과 대학에 진학해 법관이 돼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는 약자들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자네의 순수한 뜻은 좋지만 자신의 현실과 위치와 실력을 냉정히 검토 해야 할 것이며 법과나 정치과나 인문계 학과를 졸업해서는 취직 할 곳이 없는 실정인데 자네는 졸업 후 직장이나 먹고 살 수 있는 학과를 선택 해야 될 형편이니 신중하게 결정 하기를 바라네" 그 후 계속 고민하고 연구했지만 내 머리로는 답을 찾을수가 없는데 선택을 해야 될 날이 닥아왔다.
선생님은 집으로 나를 초대해 저녁을 함께 나눈 후 미리 준비한 대학 입학지원서를 내놓고 “ 진학에 대한 결정을 했나?" “ 아직 결정을 못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다방면으로 알아 본 결과 앞으로 영화 예술 분야가 가장 각광을 받고 전망이 좋은 학과라고 판단하게 돼 자네를 서라벌 예술 대학 연극 영화과에 추천하기로 결정 했네. 그 동안 자네를 지켜 본 결과 훌륭한 배우가 될수 있는 특성이 있고 그 분야엔 내가 아는 지인들도 많이 있네”
상상조차 할 수없는 연극 영화과를 추천 받은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속이 복잡해 졌다. 배우라니 그 당시 배우란 직업은 천시의 대상이었고 보수적인 시골 아버지와 집안 어른들이 서울에서 딴따라 배우 공부를 한다면 기절초풍 할 일이라 머리가 복잡해 대답을 못하자 선생님께서 “ 세상은 변해가고 새로워지고 있다. 넓게 깊게 보고 멀리 본 후 선택 하기 바란다"
나는 6.25 동란 후 여러가지 경험과 선택을 했지만 이번에는 나 혼자 결정 하기엔 너무 힘들고 어려웠다. 책 장사를 하듯 함부로 결정해 낭패와 화를 당하는 선택을 되풀이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머리를 쥐어 짜면서 연구 검토한 끝에 사회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선생님이 추천한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길 이라고 생각해 서라벌 예술대학 연극영화과를 지원하게 됐다. 시골 농부의 아들이 꼴통 양반 안동 권씨의 운명이 딴따라 배우로 바뀌게 되는 순간이다.
졸업 3 개월전 낙양공고는 중앙대학 부속 고등학교로 편입됐다. 임영신 중앙대학 이사장겸 총장의 교육에 대한 원대한 꿈이 시작된 것이다. 중대 부속 고등학교 첫 졸업생들은 중앙대학으로 진학을 많이 했고 최원용 군도 중대를 선택했다. 이기행 군은 동국대를 지원했다. 50 년대 후반 사회 실상은 가난했고 무질서해 돈과 빽 ( 배경. 줄 ) 만 있으면 무엇이든 만사형통이라 일반화된 유행어가 돈과 빽이면 처녀도 애를 난다였다. 부패와 부조리가 만연된 최악의 상태였지만 자녀들에 대한 부모들의 향학 열기는 대단했다. 밥을 굶어도 어떻게 하든 대학을 보내는 것이 꿈이었고 지상 목표였다. 그 때문에 공부를 잘 하든 못하든 졸업 후 취직이 되든 어떻든 일단 대학이 부모들의 목표였다. 그리고 문교 정책도 갈팡질팡이었고 입학 정원도 고무줄 이었다. 일부 사랍대학은 신입생을 지원 하는대로 다 받아들여 합격률 90프로 이상이었고 입학금 등록금으로 대학마다 고층 빌딩이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