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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마음의 필터를 살펴보다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6-05-11 10:44:09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버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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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책을 읽다가 마음이 울리는 문장 하나를 만났다.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마시는 물은 우유가 된다.” 마치 매일 마주하는 인간관계와 소통의 모습을 선명하게 표현한 것 같았다. 이 짧고 멋진 구절의 출처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글이었다. 

생각해 볼수록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똑같이 맑은 물줄기일지라도 그것을 들이키는 존재의 특성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되고, 다른 이에게는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영양분이 된다는 가르침, 결국 소통의 결과는 말하는 이의 화려한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 그릇’에 달려 있다는 것이 가르침으로 마음에 다가왔다.

사람은 하루에 수만 마디의 말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고 한다. 직장 동료와, 이웃과, 오랜 친구의 조언이나 가족의 걱정 어린 안부까지 그 대화의 종류도 다양하다. 이 모든 말은 소통이라는 강물에서 길어 올린 ‘물’과 같다. 그런데 가끔은 이 깨끗한 물이 상대방의 마음에 닿는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변질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보자면, 몹시 지쳐 보이는 지인에게 “가끔은 쉬어 가며 하세요.”라고 진심 어린 말을 건넸다. 분명 걱정과 배려를 담은 말이지만, 받는 이가 만약 깊은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에 빠져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말은 그의 귀를 통과하는 순간 “당신 참 초라해 보이네요.”라는 비아냥으로 필터링 될 수 있다. 순식간에 “너는 부족하니 더 노력해야 해”라는 지적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대화란 결코 단어의 의미만으로 매끄럽게 전달되는 과정이 아니다. 나 역시 얼마 전 “왜 그러세요?”라는 한마디 때문에 상대가 마음을 상해하여,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서야 겨우 관계를 회복했던 경험이 있다. 빈정거리며 한 것도 아닌데 내가 내민 맑은 물이 상대의 내면에서 독이 되어 다시 나에게 돌아올 때, 아무런 공격 의사가 없었기에, 되돌아오는 화살이 더 아프고 서글프게 다가오는 것 같다. 

우리 마음속에는 저마다 지나온 세월과 상처, 그리고 자존감의 무게로 빚어진 ‘필터’가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내면에 해결되지 않은 결핍이나 생채기가 남아 있으면, 평범한 안부조차 때로는 아픈 약점을 건드리는 자극이 되기도 한다. 마음의 필터에 상처의 찌꺼기가 두텁게 쌓일 수록 순수한 호의조차 공격으로 오해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내면에서 날카로운 독침을 꺼내 들고 만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남의 일이기만 하랴. 누군가의 진심을 간섭으로, 칭찬을 가식으로 치부하며 독을 키웠던 적이 내게도 있지 않았던가. 노년의 문턱에 다다르고 보니 원숙한 삶이란 마음의 필터를 맑게 정화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월 속에서 낡고 오염된 내 마음의 필터를 교체할 사람은 오직 나 뿐일 테니, 남이 던진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며 독을 품기보다는, 그 말이 내 안에서 왜 독으로 변했는지를 먼저 살펴야 겠다. 조언을 조언 그대로, 사랑을 사랑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의 그릇을 넓히는 것. 그것이야 말로 삶의 지혜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매일 세상이라는 거대한 강가에서 물을 마시며 살아갈 것이다. 그 물을 무엇을 빚어낼 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내가 마신 물은 누군가를 해치는 독일까, 허기를 채워주는 따뜻한 우유일까? 고요한 저녁, 내 마음의 필터가 걸러낸 문장들이 누군가에게는 부드러운 우유가 되어 흐르기를, 그리하여 모든 관계의 소통이 맑은 시냇물처럼 다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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