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모성애'를 주제로 하는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발표하던 한 젊은 여성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래,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하고 코끝이 싸해지는 존재가 바로 엄마다. 더구나 우리는 타국살이 아니던가. 내게도 비슷한 또래의 딸이 있는지라 그 감정에 백분 공감할 수 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남달리 효심이 깊은 딸을 가진 그의 엄마가 내심 부럽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자신의 엄마라며 흐느끼는 모습에 전체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애잔해졌다. 그러나 한번 터진 울음이 거의 통곡하는 수준에 이르자, 저러다 기절하는 거 아니야? 엄마에 대한 추억이 저 정도라면 거의 트라우마 수준이 아닌가? 도대체 그 엄마의 일생이 얼마나 비참했기에 눈물바다를 만드는 걸까? 세상에 불행만으로 점철된 인생은 절대 없다고 믿는 내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사랑 중에 모성애만큼 무조건적인 사랑은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헌신적인 모성애는 내 자식에게는 거의 본능적인 일이다. 그 희생을 그저 불행했다고 하는 것도 마땅치 않았지만, 엄마가 불쌍하다는 표현에 내 마음이 불편해졌다. ‘불쌍하다’는 눈으로 판단하는 시각적 언어다. 만약에 내 딸이 나를 불쌍하게 여긴다면? 아, 그런 내 인생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가끔 한국 드라마를 볼 때면 의문이 들었다. 왜 가난으로 고생한 엄마는 지극한 헌신이라 치켜세우고, 늘 감동적 이야기로 미화시켜 눈물을 자아내지? 반면 사회적 지위나 재력이 있는 엄마는 부정직하고 갑질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왜 그러는 걸까? 모성애가 존중받는 이유는 엄마가 겪은 가난이나 고난 때문이 아니라, 한 여성의 무한한 희생과 헌신의 존엄성 때문이어야 마땅하다.
어릴 적엔 눈에 보이는 상처 때문에 무작정 울음부터 터뜨린다. 나이가 들면 그 상처가 가진 보이지 않는 의미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복경호우(福輕乎羽)라는 말은 “새털보다 가벼운 것으로도 마음먹기에 따라 스스로 행복을 찾는다.”라는 장자의 말씀이다. 그렇다. 그 새털 같은 행복만 있어도 불행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엄마다. 엄마의 불쌍했던 모습을 기억하며 울기보다는, 불행 속에서도 자신을 길러낸 헌신의 가치와 의미를 자녀들이 자랑스럽게 전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내 딸에게 나는 어떤 엄마였을까.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 봐도, 언제 어디서든 아이 때문에 내가 하고픈 것을 포기했던 기억이 없는 걸 보면, 분명 희생적인 엄마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동안 엄마로서 했던 모든 일은 최고의 헌신이었다고 믿는다. 이기적인 모성애라 할 수도 있었지만, 엄마로서의 해낸 내 인생의 한 부분이 사회적 고정관념 때문에 미화되거나 폄하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장성하고 나니, 제각기 자신의 삶을 즐기는 하나의 존재로 살아간다. 서로 기쁨과 위안을 주고받을 수 있어 좋다. 삶의 만족감도 점점 커진다. 지금까지 살면서 엄마로서 얻은 그 많은 행복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아이들 덕분에 얻은 호칭 “엄마'는 내 평생 받은 명칭들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부름말이다.
